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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서 설죽화로 개명하다“할아버지, 아버지 원수를 갚고 나서 혼인해도 늦지 않아요.”“설화야, 너는 사내가 아니야. 그냥저냥 집에서 공부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거라. 세월은 금방 흐른단다. 네 애비는 운명이 거기까지밖에 안 되는데 네가 어떻게 무술을 배워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는 거야?”설화의 할머니도 손녀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출가하겠다는 손녀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할머니, 제가 아버지의 원한을 갚아드리지도 못하면 그 죄스러움을 평생 가슴에 응어리로 묻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무술의 고수가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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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3.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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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산(入山)을 결심하다“설화야, 맵짠 바람이 아직도 사방에서 불어오는 판에 어디를 간다고 하는 게야? 그리고 네가 거란 오랑캐를 상대로 어떻게 아버지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시면 경을 치실 거다. 잠자코 있거라.”홍 씨 부인은 지아비의 죽음으로 인하여 받은 충격이 가실 즈음에 또 충격을 받아야 했다. 설화가 비록 나이 어린 소녀였어도 외모는 처녀티가 날 정도로 성숙했다. 딸이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홍 씨 부인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어머니,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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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3.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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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가문의 무남독녀“모든 것이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소녀가 아직도 많이 민충합니다. 부단하게 노력하여 반드시 스승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네가 너무 겸손하구나. 네 나이에 이 만큼의 학식을 쌓는다는 것도 어렵단다. 네가 소양배양하지 않고 사물을 보는 눈이 재바르며, 일단 깨달은 것을 가축하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너에 대한 훈육을 부탁하셨다. 지금까지 배운 병서 내용 중에서 하나만 물어보겠다. 아는 데까지 답하여 보아라.”이관은 여천 선생에게 설화를 맡기면서 경서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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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3.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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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아오른 지하황주현몇 겹 속에 갇히면그곳이 지하가 된다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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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4.03.0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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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설죽화 스승의 여제자에 대한 기대황음무도한 야율문수노는 그의 이름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올해로 마흔여섯인 그는 풍신이 장대하고 상당한 호색한으로 소보살가(蕭菩薩哥) 등 부인 세 명을 두었다. 그 외에 첩으로는 귀비 소씨(蕭氏) 등 열여섯 명을 두었고 자식은 야율종진 외에 스무 명이 넘었다.고려 성종(成宗) 십 년, 거란의 부마이자 동경유수인 *소항덕은 팔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동원한 군사는 육만여 명에 불과했다. 그는 거란 왕 야율문수노의 누이인 야율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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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3.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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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적인 거란왕, 야율융서웅숭깊고 오달져 보이는 홍 씨 부인의 뺨 위로 매작지근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관의 부모는 병사들로부터 아들의 무용담을 듣고 겉으로는 무척 대견해 했다. 애전 전투에서 전사한 대부분의 고려군은 북계의 *강동 육주 출신이었다.전쟁 끝물에 강동 육주에 있는 마을들 대부분이 초상(初喪) 촌이 되다시피 했다. 관아에서는 전사한 사람들의 가족에게 약간의 부조를 하고 현령이 마을을 돌며 유가족들을 위로하였다. 마을마다 공동묘지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한동안 슬픔에 잠겨있어야 했다.‘이관이 애전 전투에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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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2.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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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다짐하다설화도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자신이 딸로 태어난 것을 두고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술 연마에 진력했다. 이관은 전쟁이 일어나면 북계 서북면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으므로 딸에게 무술을 가르쳐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할 심산이었다.그런데 이관이 설화에게 검술과 수박을 가르쳐보니 딸이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잘 따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스스로 터득할 정도로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특히, 검술은 타고난 듯 고난도 기술을 잘도 소화해 냈다.이관은 틈만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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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2.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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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명서영탁구공이 붙잡혔다탁구만 쳤을 뿐인데 단지게임이 두 사람을 얽었을 뿐인데집중을 요구하는 불안한 실내그의 강의는 불온한 강요가 되고 질문은 정해진 답을 요구하고 있다집요하게 한곳만 고집하는 지루한 그와 사방팔방 튀고 굴러야 직성이 풀리는 나파란 그는 채워져야 배부르고 나는 하얗게 비워야 편하다탁구대를 이해한 적 없는 나와 공의 속성을 풀어 본 적이 없는 그가 같은 공간 조각난 거울로 각자 서로만 비추고 있다둘 사이 상황적 온도는 매번 달라도 미진한 습도는 나란히 강산을 건넜다대화도 결론도 산 넘어 산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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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4.02.0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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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여전(父傳女傳)“요즘 세상에 설화 같은 효녀가 또 어디 있으려고? 이관이 살아 있으면 한참 귀여움을 받고 자랄 나인데…….”“설화가 노는 모습을 보면 사내 같은데, 얼굴을 보면 홍 씨 부인을 닮아서 그런지 당실한 것이 참으로 고와. 어린 것이 가만히 보면 마음 씀씀이도 꽤 푼푼해. 나는 여태껏 저 애가 무람없이 행동하거나 마을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골풀이 하는 것을 보질 못했어. 건넛마을 최대인이 며느릿감으로 점찍어 놨다는 말도 있어. 아무튼, 저 애는 이 씨 집안에 복덩어리가 틀림없어.”“저 애는 미구에 무등 서북면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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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2.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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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가문의 무남독녀간밤에 내린 폭설로 천지 사방이 온통 백색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웃과 겨우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길을 내놓고 온종일 집안에서 두문불출 했다. 귀주성(龜州城) 인근에 있는 덕실 마을은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마을로 주변 풍광이 매우 빼어났다. 청룡산, 검산, 팔령, 굴암산이 귀주를 감싸고 황화천과 구림천 그리고 팔령천 등이 귀주의 여러 마을을 에두르며 흐른다.덕실 마을은 황화천이 굽이쳐 에돌아 흐르며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토질이 비옥하고 넓은 평야 지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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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4.01.2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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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짜다황영기몸살 난 집을 데리고 경주로 가자빈 노트가 스케치하기 전 살며시 문을 열어비에 젖어도 바람에 옷이 날려도 좋아, 아무렴 어때나갈 때 잊지 말고 우산을 챙겨줘돌아온다는 생각은 깊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먹다 만 밥은 냉동실에 혼자 두고머리는 세탁기에, TV는 버리고 발가락이 듣고 싶은 곳으로실선으로 그려진 옷소매에 손을 넣고 버스에 올라별이 기웃거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능소화 꽃잎 같은 사연을페달에 담아 바람에 날리자친구가 필요할 거야 그럴 때는 친구를 잊어무덤 속 주인이 말했다지퍼처럼 잎을 내렸다 올리고꽃은 단추처럼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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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4.01.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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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몽중인“대장군, 잠시도 지체하면 안 되오. 고구려 기병대가 추격해오고 있소이다.”“시끄럽소이다. 당신은 총애하는 부하가 전사하여도 그리 비정하게 말할 거요? 살고 싶으면 당신이나 먼저 가시오.”우중문이 우문술을 향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대장군들은 싸우지 마시오. 좌익위대장군 말씀이 맞아요. 곧 고구려군이 들이닥칠 것이오.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오.”유사룡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렸다.“저 압록수에도 우리 별동대를 기다리는 야수 같은 고구려놈들이 있을 것이오. 유 위무사, 어찌하면 좋소?”“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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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뉴스
2024.01.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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