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면은 짜장면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이다.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짜장면에 비하면 그 역사성은 매우 짧은 편이라고 하겠지만, 1970~80년대 직장인과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2002년 일본 신주쿠의 한 백화점에서 열린 ‘한국 10대 도시 향토요리전시회’에서 쫄면은 서울의 모듬전, 부산의 동래파전, 대전의 죽
1962년 재일교포 박노정 씨가 일본 닛산과 기술제휴를 통해 부평에 새나라 자동차를 세웠다. 1962년 4월 군사정부가 발표한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1962년 8월 27일 새나라 자동차 공장 제1단계 준공식에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도 참석하였다. 박정희 의장은 이날 축사에서 “우수한 자동차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외
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고속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이다.인천과 서울 간 급증하는 인적·물적 수송 수요에 대비하여 건설한 것으로, 1967년 3월 24일에 착공하여 1968년 12월 21일 양평동에서 가좌 나들목 구간이 우선 개통됐다.1967년 5월 27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는 경인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경인고속도로는 기존 1시간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판유리 공장은 인천에 설립됐다.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기간산업 시설이 파괴되고, 우리나라는 유리 한 장도 만들 수 없는 어려운 처지가 됐다.운크라(UNKRA: 유엔한국재건기구)의 도움으로 1956년 동구 만석동 석탄공사 저탄장 자리에 인천판유리공장 건설을 시작했다.2월 14일 오후 2시에 열린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
인천 강화 출신의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한글 점자를 창안한 것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지 약 500여 년이 흐른 1926년 11월 4일이었다.이 점자를 ‘맹인(盲人)을 가르치는 바른소리’라는 뜻의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고 하였다. 박두성은 시각장애인에게 ‘
자치구 출범 30주년을 앞두고 있는 인천 남동구는 명실상부한 인천의 중심이다. 인구 수나 예산 등 외형적인 규모 뿐만 아니라 지역 정치ㆍ경제 ㆍ사회 ㆍ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인천 10개 구ㆍ군을 선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민선 6기 3주년을 맞는 장석현 구청장은 현재 보다도 늘 미래의 가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남촌 에코산업단지 조성 추진과 LH 첨단산업단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한 웃터골운동장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분지였다.이곳은 러일전쟁 당시 철도감부(지금의 철도청)의 합숙소가 되었다가 인천부 소유가 된 땅으로 골짜기 전체가 작은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자연스레 인천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공간이었다.개항 후 일본인의 진출이 많았던 인천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 대한 민족적 차별에 시달렸고 자연 이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에 의해 성냥공장이 세워졌는데, 일본제 성냥이 범람하면서 생산이 중단되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이 자료를 통해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냥의 국내 전래는 1880년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 갔다가
인천항이 개발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은 개항(1883) 직후인 1884년 9월 인천상인단체의 출자에 의해서였다. 당시는 현 올림푸스호텔 언덕 아래 해관 자리 앞 해안에 석축을 쌓고 잔교(棧橋) 1기와 돌제(突堤) 1개를 만들었는데, 항만으로서는 초보적인 시설에 불과했다.1893년 두 번째 개발사업으로 영국인 기사 챔버스의 설계에 따라 해관 앞의 바다를 메워서
오래전 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민족문화상징’의 하나로 짜장면이 선정되었다. 김치, 떡, 삼계탕, 불고기, 냉면 등과 함께 음식류 10개 항목에 포함되어,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반면, 여전히 짜장면을 온전한 ‘한국음식’으로 부르기를 거부하는 목소리도 있다. 짜장면의 원류가 중국의 &lsq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887년 3월 경복궁에 최초의 전등이 켜지고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시작됐다.인천에서 전기 사업의 시작은 1905년 6월 각국 외국인이 모여 공동 출자한 인천전기주식회사가 시초이다. 주주 총인원 79명 중에서 일본인 18명, 서구인 13명, 청국인 8명이었다.자본금 12만 5천원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1906년
인천공립보통학교는 창영초등학교의 옛날 이름이다.이 학교는 일본인 교사 1명과 한국인 부교사 1명을 교원으로 임명하고, 1907년 5월 6일 개교하였다. 원래는 인천객주조합에서 설립한 용동의 제녕학교를 인수해 개교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인천일어학교 교실 1칸을 빌려 3명의 학생을 모집해 개교하였다. 교장은 인천부윤이 겸했다.그 해 6월 제녕학교 학생 74명
1903년 6월 설립된 제녕학교(濟寧學校)는 인천 최초로 민간인이 경영하는 학교였다. 제녕학교 설립은 인천의 유지 서상빈(徐相彬)이 주도하였고, 김정곤(金貞坤)이 도움을 주었다.인천 태생의 서상빈은 1889년 개항 초기에 인천감리를 지낸 서상집(徐相潗)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이자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會社)를 설립하여 실질적인 사
한국 최초의 정식 이민은 인천 제물포에서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하와이를 향해 출발한 데서 비롯된다. 이후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총 64회 7,400여 명의 이민이 계속됐다. 하와이에서는 19세기 초 사탕수수농업이 크게 발달하여 경제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자체 노동력의 부족으로 거의 외국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82년 청국에 파견된 유학생에 의해서였고,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1894년 1월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국내 사정으로 개통된 것은 4년 뒤인 1898년이었다.당시 각 아문(衙門)과의 연락을 위해 덕수궁에 전화시설을 마련했는데, 1월 28일 인천항 감리가 “ 오후 3시에 영국 범선 3척이 입항 할 것&rdqu
1893년 고종은 해군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을 강화도에 설치했다.이에 앞서, 영국 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1892.12), 해군학교 설치령도 반포했다(1893.3). 그리고 경기와 인천 연안의 방비를 총괄하는 군영의 명칭을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으로 바꿨다.조선수사해방학당은 총제영에서
경인철도는 1897년 3월 29일 기공되어 1899년 9월 18일 개통된 한국 최초의 철도이다.경인철도 개통 이전 서울과 인천 사이의 교통은 우마차 등으로 12시간이 걸리던 육로교통과 인천~용산간의 뱃길에 의존하고 있었다.개항 후 인천항을 발판으로 한반도 각지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열강은 경인선 철도부설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는데, 경인철도 철도부설권은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인천을 출입하는 외국기선이 증대함에 따라 대외무역이 확대되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통권이 새롭게 형성됐다.그러나 자본 발달이 미약한 조선으로서는 초기 해운업을 정부 직영의 형태로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1885년 전운국(轉運局)을 설치하고, 이듬해 해룡호(海龍號)·조양호(朝陽號)·광제호(廣濟號)
개항 후 인천은 국내 최대의 미곡 집산지이면서 수출항으로 부상하였다. 근대식 정미소가 생겨나기 이전 초기 수출단계에서는 벼를 가마채로 배에 실어 보냈으나 부피가 크고 무게가 무거워 경제적이지 못했다.그래서 벼의 겉겨를 벗겨 현미 상태로 수출하는 매갈잇간이 생겨났고, 백미도정이 가능한 정미소가 생겨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인천 최초의 기계식 정미소는 188
조선 정부는 당오전(當五錢)의 폐단이나 중량이 무거웠던 상평통보를 대신한 신식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1888년 2월 선혜청 별청 자리에 경성전환국을 두고 신식화폐를 발행했다.그러나 거의 유통되지 못하였고 시험적 단계에 그치고 말았다.1891년 11월 전환국으로 하여금 1888년에 주조하다 중지한 바 있는 은화·동화 등 근대화폐를 다시 주조하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