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9월 29일, 영국해군 군종사제였던 코프(Corfe,C.J.) 주교가 랜디스 (Landis, E.B.) 등 선교사 6명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여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그 해 10월 성공회 의료 선교사 랜디스는 성당 밑에 집을 구해 임시 진료소로 사용하며 의료구호 활동을 펼쳤다.1891년 10월 16일, 랜디스는 지금의 내동 성공회교회
1883년 인천 제물포가 개항되고 그 이듬해 각국공동조계가 설정되면서 1888년 응봉산(鷹峰山) 일대에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찐의 설계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Public Garden’이 조성됐다.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불리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현 인천여상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공원인 동공원과 대비해 서공원이라 불렸으며, 광복이
1884년 여름, 조선을 방문한 맥클레이(Mcclay,R.S.)는 고종으로부터 선교 윤허를 받았다.당시 맥클레이는 일본에 체류 당시 친분을 맺었던 김옥균(金玉均), 미국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L.H.)와 동반하여 고종에게 선교의 뜻을 전하였다.고종은 병원과 학교를 먼저 개설하고 점차 선교할 것을 권하였다.○ 한편,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인천항 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는 개항 후 인천에 들어온 외국 상권에 대항해 1885년 구성되었던 인천 객주회를 모체로 한 단체이다. 동업조합 수준이었던 인천 객주회의 정신은 1897년 인천항 신상협회에 승계됐다.신상협회는 서상목·서상빈·박명규 등이 발기하여 인천의 객주업체와 사회유지 50여명을 회원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단순히 상
19세기 서구인들은 동양인의 생활이나 관습 등에 관심이 많아 여행을 통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런 까닭에 조선에는 우수한 모피와 종이, 아름다운 도자기, 인삼이라는 영약, 풍부한 해산물이 있다거나, 옷을 장식할 정도로 금이 흔하고, 묘에는 호화로운 부장품을 함께 묻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이러한 기록들은 여행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넘어서 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왕릉은 왕족의 지위와 예법에 맞게 세심하게 건축된 복합 시설이다. 고려시대의 왕릉은 대체로 고구려, 신라의 능 형식을 이어받았고, 조선시대에 계승됐다.신라시대에는 목재로 안쪽을 댄 넓은 구덩이를 마련해 돌로 채운 다음 흙으로 덮는 고분 방식인 한국 특유의 무덤 체계가 나타난다.고려시대의 왕릉들은 산기슭에 3~4층 단을 쌓고 맨 윗단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고려왕조가 무신집정기에 접어든 직후인 13세기 초,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몽골[蒙古]의 출현으로 새롭게 재편됐다.몽골군의 계속된 침공으로 고려는 1232년(고종 19)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는데,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기까지 39년간의 ‘강도시대(江都時代)’를 열게 됐다.강도시대에는 팔만대장경 간행을 통한 정신력의 결집으로
인천은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나름의 특징이 있었다.바다와 근접해 ‘물’의 의미가 담긴 비류의 미추홀(彌鄒忽)과 매소홀(買召忽)로부터 ‘도읍’이었던 의미가 담긴 소성현(邵城縣), 고려 ‘왕실’과 관련되었던 경원군(慶源郡), 인주(仁州), 그리고 조선 태종 13년(14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농업국가로,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 수요의 충족을 위해 새로운 경지를 개발하는 사업은 고대로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다.이중에서도 자연적으로 형성된 해안의 간석지를 농경지로 변화시키는 간척사업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도 경험 속에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충분히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그러나 간척은 많은 인력과 물자가 들어가는 대규모 토
개천대제(開天大祭)는 국조(國朝) 단군(檀君)의 탄생과 고조선의 건국을 기념하는 제례이다.매년 10월 3일 ‘개천절’행사와 더불어 마니산 참성단, 태백산 천제단, 지리산 삼성궁 등 전국의 단군 성지에서 개천대제가 열린다.이들 개천대제 중 역사적 시원성과 고유성, 그리고 대표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곳은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
인천 강화도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곳으로 전하는 참성단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게 했다는 삼랑성이 있다.단군의 주요 활동 무대는 평안도와 황해도로 단군 관련 유적은 주로 북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 등 각종 사서와 지리서에 언급된 남한 지역 단군 유적은 참성단과 삼랑성뿐이다.참성단은 원형으로 쌓은 하단 위에 방형의 제단을 둔
한국 최초의 보육기관은 1894년 인천에 설립된 해성보육원(海星保育院)으로 알려져 있다. 1893년 답동성당이 완공되고 이어 1894년 수녀원이 건립되면서 마리클레멘스, 엠마누엘, 사베리오 등 3명의 수녀가 답동성당에 파견되었다.이들은 보육사업과 더불어 무료 진료를 매개로 선교활동을 펼쳤는데, 집 없이 방황하는 어린이들을 보호하면서 해성보육원의 전신인 제물
향교(鄕校)는 수도 이외의 각 지방에 설치해 유학을 교육한 관학(官學) 교육기관이다. 고려 초에 이미 향교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 설치된 시점이 정확히 언제부터인가는 확인하기 어렵다.『교동읍지』에는 교동향교(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8호)가 고려 인종대에 설치됐다고 한다. 인근의 강화향교가 1127년(인종 5)에 세워진 것을 고려한다면 교동향교 역시
▲민선 6기의 역점사업은 지역 일자리 창출. 장석현 구청장이 기업을 방문해 현장을 살펴본 뒤 기업과 역주민 채용을 위한 협약을 맺고 있다. "54만 구민만을 바라보며 구정을 펼치겠다. 이젠 불편하고 번거롭워도 공무원들도 관공서의 문턱을 낮추고 권위와 형식을 버리고 주민들을 받드는 '섬김 행정'을 펼쳐야 한다" 취임 2주년은 맞은 민선
1886년 한국과 프랑스간 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조선에서의 선교가 가능해지자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서 조선에 신부를 파견했다.1889년 7월 1일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Wilhelm,J.) 신부가 인천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답동성당(당시 제물포성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비록 임시로 예배를 드릴 공간을 마련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로
‘파시(波市)’란 글자 그대로 ‘물결[波]’을 타고 바다에서 열리는 ‘시장[市]’을 일컫는 말이다. 일찍이 연평도는 흑산도파시, 위도파시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파시로 꼽혔다. ‘파시’란 말이 처음 나타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연평도 파시에 관해 “해주 남쪽
산의 높이를 말할 때 흔히 ‘해발(海拔) 몇 m’라고 한다.해발이란 기준면으로부터 어느 지점까지의 수직 거리를 말하는데 지표 높이의 기준면인 평균 해수면은 가상의 면이므로 이것을 부동의 위치에 고정 시켜 둬야 한다.그러나, 바닷물의 높이가 일정하지가 않아 수위 측정소에서 얻은 값을 육지에 옮겨 놓은 육지의 고정점을 ‘수준원점
1902년 서울에 세워진 정동의 손탁호텔(Sontag Hotel)이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인천 개항 후 제물포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서울까지 가는 교통이 불편하여 인천에서 하루를 묵어야만 했고 이를 위한 숙박시설이 필요했다. 대불호텔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문을 열었다
오늘날의 기상관측은 단순히 일기예보만을 의미하지 않고 지진, 화산, 천문관측, 우주기상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국민의 생활을 지켜주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전근대에는 측우기와 수표 등과 같은 전통과학기술이 있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의 활용만 있었을 뿐 일반 민중에게까지 이론적으로 확대되지 못하였다.근대 개항 후,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기상관측을 위해 1904년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에 설치한 규장각의 분관이다.정조는 외규장각 설치 이후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이라 하고, 봉안품의 성격을 구분해 내규장각과 외규장각에 나누어 보관했다.강화 행궁에 외규장각을 설치한 이유는 한양에서 가까우면서도 국내의 변란과 외적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 안전을 보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