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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사랑김왕노무지렁이도 사랑이 있고은하수도 사랑이 있고먼지에게도 사랑이 있어사랑 때문에 빛이 나는 거라하물며 저 넓고 깊은 물도사랑이 있어 사랑을 찾아구름으로 피어나 흘러가고자욱한 안개로 천천히 흐르고희끗희끗 늦은 눈발로철암쯤에 하염없이 휘날리고물이 물의 사랑을 찾아아래로, 아래로 흐르다가양수리쯤서 몸 섞는 거라그래서 차가운 불이 있듯이뜨거운 물도 있는 거라때로는 흘러오는 물의 사랑홀로 기다린다고 해빙기의아침에 얼음장 깨질 때까지꽁꽁 언 얼음으로 기다려물만큼 지독한 사랑이어느 세상도 없는 거라이 시를 읽으면서 가장 쉽고도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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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3.07.1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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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족 형제의 계략“우리 아홉 형제 중 네 명이 어려서 비명에 갔고, 나머지 다섯 명 중 두 명은 서역(西域)으로 팔려갔으며, 이곳에 있는 삼 형제는 이십 년 만에 꿈에 그리던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삼 형제가 번회(樊回)같이 올곧은 의부(義父)를 만난 것도 모두가 삼생(三生)에 걸친 인연에서 맺어진 관계입니다.그러나 인간사는 오늘의 호연(好緣)이 내일은 악연(惡緣)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두 분 형님, 이제 우리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으니, 늘 가슴 속에 묻어둔 상흔을 깨끗이 지우고 본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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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7.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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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족 삼형제 자신의 정체를 알다두 아우가 찾아오자 일록은 오랜만에 아우들과 술자리를 만들고 회포를 풀고 싶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녹족 삼 형제가 워낙 탁월하고 전투에 임하면 백전백승의 전공을 세우자 행여 자신의 휘하에서 다른 장군의 밑으로 갈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우중문은 삼록 형제만큼 전투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부장이나 공격대장이 없었고, 병법을 아는 지휘관도 없었다.우문술 역시 일록 좌장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장군의 밑으로 이동할까 걱정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일록의 세 끼 식사부터 잠자리까지 챙기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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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7.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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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는 둥둥김승희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아르헨티나 아, 아르헨티나가 냄비 두드리던 소리,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여름 밤거리를 뒤흔들던 소리,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냄비, 프라이팬, 국자, 냄비뚜껑까지들고 나와 두드려대던 소리,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내지른 비명소리아르헨티나 아아빚과 실업자, 극빈자, 점쟁이와 정신과의사,사망자와 부상자들, 그 한숨소리나도 프라이팬을 들고 뛰어가 섞인 듯입을 꽈 다문 채 몇 시간씩 은행과 직업소개소 앞에 늘어선 모습들이런 광경 고요함비 내리는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며묵묵히 밥을 먹는다다리 하나 부러진 개다리밥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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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3.06.3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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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적장을 만나러 가다“장군님, 내일 가실 겁니까?”“우중문에게 약속했으니 가야 하겠지. 내가 안 가면 그자가 얼마나 섭섭해하겠는가? 남아일언은 중천금 아닌가?”“그렇지요. 내일 장군님을 압록수 건너편까지 모시겠습니다.”“그리하세. 압록수를 건너면 나 혼자 우중문을 만나러 갈 것일세.”“장군님, 안됩니다. 검술에 능한 군관 두 명을 대동하십시오. 수나라 사람들은 흉물스러워 믿을 수가 없습니다.”“그럼, 웅부관의 말대로 하겠네.”웅록은 중선(中船)을 준비했다. 중선은 돛대가 달리고 병력을 최대 50명까지 태울 수 있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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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6.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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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조국은 고구려다웅록은 마음을 진정하고 두 아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삼록과 구록이 지난 20년 동안 겪은 과정을 이야기하자 웅록은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모자 상봉의 기쁨은 나중에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일이었다. 웅록은 두 아들에게 고구려가 현재 처한 상황을 빨리 알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할 것만 같았다.“삼록아. 구록아, 너희 형제들이 고맙게도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쓰고 있구나. 고맙다. 진정하고 이제부터 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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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6.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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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이 닮았다‘아아-, 이럴 수가. 이 아이들은 내가 낳은 자식들이 틀림없다. 이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내 몸에서 나온 자식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이 아이들의 어미라고 증명을 해야 하나? 그렇지. 내가 버선을 가져 왔지.’웅록의 양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웅록의 행동에 형제는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형제는 웅록의 행동을 유심히 보면서 뇌리에 무의식으로 잠자고 있는 아릿한 기억을 반추하는 중이었다. 웅록이 얼른 투구와 갑옷을 벗고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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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6.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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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사랑김왕노 무지렁이도 사랑이 있고은하수도 사랑이 있고먼지에게도 사랑이 있어사랑 때문에 빛이 나는 거라하물며 저 넓고 깊은 물도사랑이 있어 사랑을 찾아구름으로 피어나 흘러가고자욱한 안개로 천천히 흐르고희끗희끗 늦은 눈발로철암쯤에 하염없이 휘날리고물이 물의 사랑을 찾아아래로 , 아래로 흐르다가양수리쯤서 몸 섞는 거라그래서 차가운 불이 있듯이뜨거운 물도 있는 거라때로는 흘러오는 물의 사랑홀로 기다린다고 해빙기의아침에 얼음장 깨질 때까지꽁꽁 언 얼음으로 기다려물만큼 지독한 사랑이어느 세상도 없는 거라선생님께서는 매일신문에 신춘문예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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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3.06.0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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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상봉“고맙습니다. 우중문 장군께서 이리도 우리를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과연 대국의 장수님은 다르십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중문 대장군께 고맙다고 전해주시오.”“그럼요. 우중문 대장군은 대인입니다.”웅록의 말에 진진이 거드름을 피우며 수염을 쓰다듬었다.“진진 통역사님, 이건 제 개인적인 부탁인데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웅록이 주변을 한번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웅록은 진진은 야살스럽게 생긴 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웅록은 적군의 진영에 들어와 진진 말고는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웅록은 진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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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6.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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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족부인 우중문을 만나다“어서 오시오. 통역사 진진(秦眞)이라 합니다. 나는 평양을 수백 번도 더 다녀온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그대들을 자랑스러운 별동대 총사령관이신 우중문 대장군에게 안내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대장군님을 만나기 전에 간단한 몸수색을 하겠습니다.”통역사라는 자는 유창한 고구려 말을 구사하였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웅록 일행의 몸수색을 하려고 했다. 웅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나라 병사들이 몸수색하다가 웅록이 여자라는 게 밝혀지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이보시오, 진진 통역사. 우리는 좋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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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5.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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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의비를 읽다박수봉돌이 찢어진 비문을 꽉 물고 있다입술을 다문 침묵을 쪼아빗돌의 늑골에 문신을 새긴 사람은붓을 챙겨 떠나버리고깨진 돌만 남아서 그때를 증언한다돌은 침묵을 가장하고 있지만 돌에는임진의 여름 풀꽃들이폭풍우에 쓰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스며있다비문의 진술을 딸가 보면북채를 쥔 사내 따라 삽을 놓고기꺼이 졸이 된 사람들탕, 타탕, 터지는 화구를 몸으로 막아무명천에 펄럭이는 의를 몸뚱이에 감았다돌의 찢어진 흉곽에서 진물처럼마지막 비명이 묻어 나온다지은 죄가 두려워 빽빽한 돌의 진술을찢어버리고 황급히 꼬리를 감춘섬나라 살쾡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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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3.05.2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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