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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적장을 만나러 가다“장군님, 내일 가실 겁니까?”“우중문에게 약속했으니 가야 하겠지. 내가 안 가면 그자가 얼마나 섭섭해하겠는가? 남아일언은 중천금 아닌가?”“그렇지요. 내일 장군님을 압록수 건너편까지 모시겠습니다.”“그리하세. 압록수를 건너면 나 혼자 우중문을 만나러 갈 것일세.”“장군님, 안됩니다. 검술에 능한 군관 두 명을 대동하십시오. 수나라 사람들은 흉물스러워 믿을 수가 없습니다.”“그럼, 웅부관의 말대로 하겠네.”웅록은 중선(中船)을 준비했다. 중선은 돛대가 달리고 병력을 최대 50명까지 태울 수 있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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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6.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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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조국은 고구려다웅록은 마음을 진정하고 두 아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삼록과 구록이 지난 20년 동안 겪은 과정을 이야기하자 웅록은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모자 상봉의 기쁨은 나중에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일이었다. 웅록은 두 아들에게 고구려가 현재 처한 상황을 빨리 알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할 것만 같았다.“삼록아. 구록아, 너희 형제들이 고맙게도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쓰고 있구나. 고맙다. 진정하고 이제부터 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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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6.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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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이 닮았다‘아아-, 이럴 수가. 이 아이들은 내가 낳은 자식들이 틀림없다. 이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내 몸에서 나온 자식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이 아이들의 어미라고 증명을 해야 하나? 그렇지. 내가 버선을 가져 왔지.’웅록의 양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웅록의 행동에 형제는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형제는 웅록의 행동을 유심히 보면서 뇌리에 무의식으로 잠자고 있는 아릿한 기억을 반추하는 중이었다. 웅록이 얼른 투구와 갑옷을 벗고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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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6.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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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사랑김왕노 무지렁이도 사랑이 있고은하수도 사랑이 있고먼지에게도 사랑이 있어사랑 때문에 빛이 나는 거라하물며 저 넓고 깊은 물도사랑이 있어 사랑을 찾아구름으로 피어나 흘러가고자욱한 안개로 천천히 흐르고희끗희끗 늦은 눈발로철암쯤에 하염없이 휘날리고물이 물의 사랑을 찾아아래로 , 아래로 흐르다가양수리쯤서 몸 섞는 거라그래서 차가운 불이 있듯이뜨거운 물도 있는 거라때로는 흘러오는 물의 사랑홀로 기다린다고 해빙기의아침에 얼음장 깨질 때까지꽁꽁 언 얼음으로 기다려물만큼 지독한 사랑이어느 세상도 없는 거라선생님께서는 매일신문에 신춘문예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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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3.06.0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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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상봉“고맙습니다. 우중문 장군께서 이리도 우리를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과연 대국의 장수님은 다르십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중문 대장군께 고맙다고 전해주시오.”“그럼요. 우중문 대장군은 대인입니다.”웅록의 말에 진진이 거드름을 피우며 수염을 쓰다듬었다.“진진 통역사님, 이건 제 개인적인 부탁인데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웅록이 주변을 한번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웅록은 진진은 야살스럽게 생긴 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웅록은 적군의 진영에 들어와 진진 말고는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웅록은 진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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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6.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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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족부인 우중문을 만나다“어서 오시오. 통역사 진진(秦眞)이라 합니다. 나는 평양을 수백 번도 더 다녀온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그대들을 자랑스러운 별동대 총사령관이신 우중문 대장군에게 안내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대장군님을 만나기 전에 간단한 몸수색을 하겠습니다.”통역사라는 자는 유창한 고구려 말을 구사하였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웅록 일행의 몸수색을 하려고 했다. 웅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나라 병사들이 몸수색하다가 웅록이 여자라는 게 밝혀지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이보시오, 진진 통역사. 우리는 좋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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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5.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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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의비를 읽다박수봉돌이 찢어진 비문을 꽉 물고 있다입술을 다문 침묵을 쪼아빗돌의 늑골에 문신을 새긴 사람은붓을 챙겨 떠나버리고깨진 돌만 남아서 그때를 증언한다돌은 침묵을 가장하고 있지만 돌에는임진의 여름 풀꽃들이폭풍우에 쓰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스며있다비문의 진술을 딸가 보면북채를 쥔 사내 따라 삽을 놓고기꺼이 졸이 된 사람들탕, 타탕, 터지는 화구를 몸으로 막아무명천에 펄럭이는 의를 몸뚱이에 감았다돌의 찢어진 흉곽에서 진물처럼마지막 비명이 묻어 나온다지은 죄가 두려워 빽빽한 돌의 진술을찢어버리고 황급히 꼬리를 감춘섬나라 살쾡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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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3.05.2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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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족부인 적진에 가다“형님, 페르시아 상인에게 팔려간 육록 형님과 팔록 형님이 보고 싶어요. 요즘 들어서 부쩍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형제들이 그립습니다. 우리 아홉 형제는 수나라 해적에 의해 이렇게 되었습니다.사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조국 고구려가 아닌 수나라입니다. 당장 장군 막사로 달려가 우중문과 우문술의 목을 베어 고구려로 탈출하고 싶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아 참고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 우리 삼 형제는 두 장수의 목을 취해 고구려에 바쳐야 합니다.”“쉿-, 지금은 침착해야 한다. 경거망동하다가는 우리 삼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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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5.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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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계략을 세우자을지문덕은 수군 별동대의 이동 경로와 진영 배치를 그린 지도를 펼쳐놓고 웅록과 세밀한 작전을 짜기로 했다. 지도 위에 나타난 양군의 대치상황으로 볼 때 고구려군은 압록수 남동쪽으로 이십 리쯤에 군영(軍營)을 갖추고 있고, 수나라 군영은 압록수에서 북서쪽으로 30여 리 떨어져 진을 치고 있었다.얼핏 지도에 그려진 양군의 배치도를 볼 때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를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30만 5천 명의 수나라 별동대를 5만이 채 안 되는 고구려 정예병으로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장군님, 우중문의 군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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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5.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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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족의 아들 수나라 선봉이 되다얼마 뒤에 양광이 황제에 즉위하자 우익위대장군에 임명되어 문무백관을 관리하기도 했다. 아비에 이어 양광이 또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자 우중문은 좌군 중 낙랑도군(樂浪道軍)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지지부진하자 우문술과 별동대를 이끌고 평양을 직공(直攻)하는 선봉장이 되었다.“장군님, 지금 우문술과 우중문이 한 군영에 같이 있습니까?”“아닐세. 압록수 건너 최전선에 우중문의 병영이 있고 그 뒤로 우문술의 진영이 있네. 정신 나간 양광이 우문술보다 우중문을 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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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5.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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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으로 흐르자-의병들과 곽재우 장군을 기리며명서영물이 물렁하다고 물 먹이지 마라 물은 불길 어디든 흐를 수 있다어린 잎사귀 하나가 낚아채지 못하고 놓친 빗방울이었던 나는 부림면 외딴 산골이 생성시킨 물,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십칠 년째 자라고 있는 가느다란 물줄기 스스로 일어선다스스로 낮추고 낮아져서 비로소 나는 맨땅을 적시고 길을 텄다작은 통로를 지날 때 물도 뼈를 깎고 영혼까지 쪼그려서야 나왔다겁 없는 영산은 커다란 불길, 불길 앞에서 본능적으로 계곡이 반대 방향으로 물고를 튼다방향이 없이 날아온 불, 옆 친구의 머리가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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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3.05.03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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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진영에 가다“장군, 소관 웅록입니다.”“어서 오시게. 기다리고 있었네.”을지문덕은 손수 찻물을 끓여 웅록에게 차를 대접하였다. 보통은 부하 사병들이 하는 일이었으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사에게는 그가 직접 차를 달였다. 고구려에 소수림왕 때 전진(前秦)의 순도(順道)가 불교를 고구려에 전파하면서 차 문화도 유입되었다. 차는 웅록에게 익숙한 음료였다.웅록이 태어난 곳이 바로 평양 인근에 있는 광법사(廣法寺)였고, 그를 거두어 기른 사람이 바로 이암대사(利嚴大師)였다. 웅록은 세속으로 나오기 전까지 이암대사 아래서 수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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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4.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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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들이 전하는 말박복영허허벌판 꽃 무덤아래알 수 없는 뼈들이 엉켜 있다돌멩이를 파헤쳐 열수록지층이 물고 있는 뼈 조각들이름 없는 목숨들이 층층으로 덮여 있었다누군가는 동물 뼈라 했고어떤 이는 나뭇가지라고도 했다손가락뼈들은 주먹을 쥔 듯 말려 있었고머리뼈는 앞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붓으로 꺾인 무릎 뼈에 쇠구슬이 박혀 있었다어느 연대의 시간을 관통했을쇠구슬은 녹슬어 삵아 붉었다빗소리와 눈보라를 삼키며 연명했을 뼈들침묵으로 견뎌온슬픔의 역사를 물고 있다열면 열수록 뼈들의 전언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개미떼가 의병 같았다한 방향으로 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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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3.04.2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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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족부인의 자식들다섯 살밖에 안 된 웅록의 자식들을 잡아간 해적들은 아이들을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릴 예정이었다. 아이들은 험상궂게 생긴 수나라 해적들에 의해 배의 창고에 갇혀 지내야 했다.해적들이 주로 납치하는 대상은 젊은 여인이나 어린아이들이었는데, 스물 안팎의 처녀는 보통 백양에 거래되었고, 어린아이들은 남,녀의 구분과 건강 상태에 따라 보통 오십 냥 정도에 거래되었다. 배에 갇혀 낯선 사람, 이상 기후,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등으로 아이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아이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 먹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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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3.04.22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