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모의 비정함"고얀 사람 같으니. 사람 됨됨이가 괜찮아 딸을 맡기려 했던 내가 어리석었지. 저러다 생떼 같은 딸자식만 죽게 생겼구나."딸의 임신과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최대호는 날마다 술을 마셔댔다. 금봉이는 점점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며 박달이 꼭 올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꽃피는 봄이 오면 반드시 박달이 올 거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기다려보기로 하였지만, 심신이 점점 피폐해져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이것아, 뭘 좀 먹어야지 힘을 낼 거 아냐? 자. 이 미음이라도 들어봐. 소식도 없는 작자를 기
기고
남동뉴스
2022.12.31 06:00
-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알프레드 D. 수자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일하라, 아무도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 간단한 내용의 시 같지만 읽을수록 어렵다. 살면서 위 내용을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슴에 잘 접어두고 성경말씀처럼 하나씩 꺼내어 실천하며 살고 싶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이 더 많다. 특
기고
명서영
2022.12.26 09:06
-
마을의 관심사가 되다“언니가 걱정돼서 드린 말씀입니다.”“고맙구나. 오늘은 술맛이 텁텁한 것이 마치 쌀뜨물을 마시는 것 같구나.”“언니, 박달님이 입격하시면 언니하고 혼인한다고 두 분이 약속했어요?”“아니, 그런 약속 한 적은 없지만, 양심 있는 분이면 나를 그냥 버려두겠니? 내가 그동안 그분에게 쏟은 정성이 얼마인데?”“어휴, 언니도 참. 언니는 보기에는 약아 보이는데 잘 살펴보면 무른 데가 많아요. 특히 잘생긴 남자에게는 더 그런 것 같아. 물론 언니만 그렇겠수? 대개의 여인들이 박달님처럼 헌헌장부만 보면 오금을 못 펴
기고
최재효
2022.12.24 08:42
-
잘난 남자, 잘난 여자“갑돌아,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금봉아, 이건 좀 전에 너에게 말했던 것처럼 만약의 일인데. 너 그 아기 낳을 거니? 아기 아버지가 끝까지 찾아오지 않아도 그 아기를 낳을 거야? 그래, 좋아. 만약에 그 남자가 너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그 아기의 아버지가 되면 안 되겠니? 아비 없이 어떻게 아이를 키울 거야?”“갑돌아, 너 무슨 말 하는 거야? 이 아기의 아버지는 박달님이셔. 그런데 어떻게 네가 이 아기의 아버지가 된다는 거야?”“네가 아기를 낳고도 그 박달도령이 안 오면 내가 키우겠다고
기고
최재효
2022.12.17 06:00
-
어물전 저울박종익한치 흔들림 없다중력에 몸을 맞춘 그는부둣가 차양 우산 아래 앉아중력을 이고 생명의 눈금을 사고판다저 평평한 피부, 주름살 한 줄 안 보인다우주의 무게에 목숨이 얹어지면눈금으로 화답하며한 세상 각자도생, 너도 영이고 나도 영이다어물전 앞에만 가면우주의 무게를 더하려고목이 아프게 타오르는 애간장빈 바구니는 영에 가까웠지만생명의 무게 앞에서 그녀는우주의 주인이 분명하다바구니를 대신해서덤으로 따라가는튼실한 날것 한 마리가아줌마의 기분에 따라우주 중심이 절로 왔다 갔다 한다가끔 소래 어시장을 간다. 생선을 사기 위해서도 가
기고
명서영
2022.12.12 08:54
-
이등령의 한(恨)‘이런!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우산도 없는데…….’박달은 서둘러 나루터 근처에 있는 허술한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아지가 운영하는 주막에 비하면 규모는 보잘것없지만 진눈깨비를 피해 많은 손님으로 북적였다. 바람을 쐬겠다고 빈손으로 나왔지만, 주머니를 뒤져 보니 다행히 엽전 몇 푼이 있었다.“주모, 여기 탁주 한 사발만 주시오.”“알았수, 잠시 기다리슈. 주문이 밀려서 그러우.”후덕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박달을 흘낏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박달은 금봉이를 보고 싶은 마음을 탁주 한잔으로 달래보려 했다. 공부
기고
최재효
2022.12.10 09:31
-
이등령 망부석“처자, 나를 불렀소?”“아! 이럴 수가? 서방님인 줄 알았는데…….”“원, 별 이상한 처녀를 다 보겠네. 빨리 오라고 손짓해서 달려왔건만, 늙은이를 놀리다니. 배고파 죽겠구먼.”늙은 선비를 뒤돌아보면서 금봉이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늙은 선비가 지나가자 금봉이는 그만 길옆에 바위에 걸터앉아 흐느꼈다.“서방님, 언제 오시려는지요? 서방님 기다리다 지쳐 죽겠습니다.”금봉이 힘을 내어 무거운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천천히 걸었다. 하늘 높이 솔개가 제 자리에 떠서 지상의 먹이를 발견하고 날갯짓만 하고 있었다. 이
기고
최재효
2022.12.03 06:00
-
어머니, 아직 떠나지 마세요.김왕노어쩌다 내 꿈에 오신 어머니 떠나지 마세요.이제 눈부신 사과를 따고 멀지 않아 거친 풀을 되새김질하던언덕의 소가 새끼를 낳을 겁니다.송아지에게 순둥이니 누렁이니 복덩이니 이름 하나 짓고아장걸음으로 송아지가 들판으로 뛰어나갈 때까지 어머니 계셔요.어머니가 걷던 강가의 미루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파닥입니다.그간 어머니 힘 드셨으니 푹 쉬다 가세요.내 솜씨가 좋지 않아 꿈속이 좀 누추하나 어머니 좋아하시는마당가에 심은 소국이 서리를 견디며 고봉의 밥처럼환하게 피어나면 눈요기라도 실컷 하고 가세요.어머니 내
기고
명서영
2022.11.28 08:12
-
별시를 준비하다‘사나이가 지조 없이 따라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쩌나…….’“박도령님, 제가 이런 말씀 드려 송구합니다만, 도령님께서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하셨으니 무슨 일이 있으셔도 그 꿈을 이루셔야지요. 전 처음에 박도령님이 그냥 말로만 과거를 준비하는 줄 알았어요. 제 판단에도 이 언니 말씀이 맞아요. 이곳에서는 도저히 과거 준비할 수 없어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야 하는데 언제 책을 읽어요? 지금은 자존심 다 버리시고 과거에 급제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해요. 어서 언니를 따라가세요.”간난이가 옆에 서 있다
기고
최재효
2022.11.26 07:00
-
-
-
-
-
박달, 심기일전하다“그냥 가시게요? 시장에 오셨으니 모주라도 한 사발 들고 가야죠? 도령님, 이리 오세요.”“주모가 기다릴 텐데? 빨리 가야 하잖니?”“딱 한 잔만 마시고 가요.”“그래, 그럼 딱 한 잔이야.”박달은 한 잔 술을 마시면서 간난이에게 자신의 간단한 신상을 소개하였고 간난이는 그런 박달이 측은했는지 앞으로 많이 도와주겠다고 하였다.“간난아, 고맙다.”“대신 박도령님, 좋은 일이 있으면 저에게 술 한 잔 사주셔야 해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박달과 간난이는 모주 두 잔씩 마시고 주막으로 향했다. 하늘이 꾸물거리더
기고
최재효
2022.11.19 07:10
-
-
-
아지를 다시 만나다‘한 번의 실수는 누구나 있을 수 있어. 과거는 수시로 있으니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이번에는 더욱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하면서 꼭 과거에 합격하도록 지성을 드려보는 거야. 그런데 왜 안 오실까? 내가 냉정하게 대했다고 정말로 화가 나서 고향으로 내려간 걸까? 금봉이란 처자에게 갔다면 어쩌나? 혹시 한양의 어느 주막에 계실지도 모르지. 노잣돈도 없을 텐데…….’아지는 박달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어찌하나? 수중에 돈이 다 떨어졌는데. 오늘 밤만 자면 이 봉놋방에서 쫓겨날 판인데. 이 험한 한양에서 어찌 살
기고
최재효
2022.11.12 07:00
-
어머니의 배추정일근어머니에게 겨울 배추는 詩다어린 모종에서 시작해한 포기 배추가 완성될 때까지손 쉬지 않는 저 끝없는 퇴고노란 속 꽉 찬 배추를 완성하기 위해손등 갈라지는 노역의 시간이 있었기에어머니의 배추는이 겨울 빛나는 어머니의 詩가 되었다나는 한 편의 詩를 위해등 굽도록 헌신한 적 없어어머니 온몸으로 쓰신저 푸르싱싱한 詩앞에서 진초록 물이 든다사람의 詩는 사람이 읽지 않은 지 오래지만자연의 詩는 자연의 친구가 읽고 간다새벽이면 여치가 제일 먼저 달려와 읽고사마귀가 뒤따라와서 읽는다그 소식 듣고 종일 기어온 민달팽이도 읽는읽으
기고
명서영
2022.11.07 08:40
-
시련이 시작되다금봉이는 이등령에서 넘어져 갑돌이에게 업혀 온 뒤로 한동안 집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있었다. 밥맛이 없다며 하루 세끼의 밥도 먹지 못하고 자꾸 헛구역질했다. 최대호는 딸의 그러한 상태를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을 태우고 있었다.‘과거가 끝난 지 스무날이 훨씬 넘었는데 어찌 된 일일까? 박달 도령이 와도 벌써 왔을 텐데.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혀 그런가?’최대호는 궐련을 입에 물고 멀리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딸의 배가 아직은 마을 사람들 눈에 뜨일 만큼은 아니지만, 곧 마을 사람들은 딸의 비대해
기고
최재효
2022.11.05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