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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의 수난“나 무겁지?”“아냐, 괜찮아. 벌말까지 얼마든지 갈 수 있어.”갑돌이 금봉이의 따뜻한 엉덩이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금봉이와 잘 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었다.“금봉아, 난, 난 네가 좋아. 난 예전부터 너에게 장가드는 꿈을 꾸고 살아왔거든. 그런데, 그런데 그 꿈이 산산조각 난 것 같아. 억장이 미어져 못 견디겠어. 너, 나랑 부부가 되면 안 되겠니?”“미안해.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난, 난 박달님에게 마음을 주어 버렸어. 그래서 이제는 나도 내 마음을 나 혼자 통제하지 못하겠어.”갑돌이 흐느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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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2.10.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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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아 해로윤유점바다는 창백한 숨을 몰아쉰다. 뱃전을 넘나드는 파고에 수부들은 생의 얼룩을 찍는다 물보라가 하얗게 일어서고 포식자는 재빠르게 입을 벌린다 스키프가 바다를 향해 튀어 오르면 날카로운 굉음이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어군을 향한 투망은 저항을 끌고 간다 천 킬로미터의 그물은 이백 미터 깊이로 내려앉는다 커다란 원을 따라 돌고 도는 어족들 쏜살같이 흩어지다가 모여든다 교란하는 방향타가 빠르게 수면을 밀면 흩어진 대오는 고기 떼를 수습한다 미로를 유희하는 어망 아래의 상어 떼 조타명령을 내리는 선장의 목소리가 거칠다 선원들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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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2.10.2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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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밤거리를 배회하다.“안돼요. 안돼요! 우리 서방님을 끌고 가시면 안 돼요. 이 분은 오늘 과거에 합격하신 분이세요. 군관님, 잠깐만요.”‘아지가 여길 어떻게 알고?’“아, 아지?”“서방님, 이게 어찌된 일이세요?”“군관님, 우리 서방님은 그제 과거를 보셨어요. 오늘 합격자 발표를 보시고 기분이 좋으셔서 한잔 마시다 말다툼이 일어났어요. 우리 서방님은 착한 분이세요. 잠시 저 좀 보세요.”아지가 사령을 끌고 모주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있다 나왔다.“험-, 여봐라! 저분만 풀어드려라.”‘아지가 어떻게 하였기에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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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2.10.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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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마골 결투“수돌아, 너희들은 먼저 가라.”“너는?”“응, 아무래도 금봉이가 위험해.”“그래서 금봉이 뒤를 따라가려고? 그럼, 나도 같이 가자.”“안 돼. 너는 애들하고 어서 내려가. 너희들은 빨리 내려가 집에 나뭇짐을 부려야지. 어른들이 걱정하셔.”“야, 나도 가야 해.”수돌이도 갑돌이를 따라 이등령을 가겠다고 하자 갑돌이와 수돌이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생겼다.“수돌아, 애들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라. 나 혼자 금봉이 뒤따라 갈 테니.”“네 걱정이 아니라 금봉이 걱정돼서 그래. 그러니 내 앞길 막지 마.”“야, 너 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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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2.10.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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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고대동짓달 기나긴 밤 한허리를 둘러 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고운 임 오신 날 밤이어 든 굽이굽이 펴리라“조오타. 정말로 죽여주는구나.”“정말로 황진이가 환생한 듯하구나. 너, 이 모주집에서 썩긴 아깝다.”“그럼, 오라버니들 따라가면 기생이라도 만들어 주실래요?”“조오치. 애월아! 너 나 따라서 가자. 내가 기생청에 등록시켜 줄 테니.”박달과 두 남자는 애월이와 어울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을 퍼마셨다. 박달도 애월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울분을 삭이려고 하였다.“ 서방님께서 어찌된 것일까? 벌써 저녁때가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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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2.10.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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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송가프리드리히 실러환희여.아름다운 신들의 광채여.낙원의 딸이여.우리는 감동에 취하여빛에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우리는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한다.그대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만인이여.서로서로 손을 마주 잡고다함께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서로 껴안고 전 세계를 포옹하자.만인이여,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이그대들의 길을 달리자. 얼마 전 우연히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합창] 교향곡을 친구들과 들었다. 20년간 음악학원을 운영하였던 나로서는 베토벤의 음악을 많이 들었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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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2.10.0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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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마골 동병상련“아, 그래요? 그럼 우리 합석해서 이번 과거에 관하여 토론이나 해봅시다.”“그럼, 실례하오. 난 경상도 풍산에서 올라온 박달이라 하오.”“난 경기도 사람이오. 성은 박가고 본관은 반남(潘南)이요”“난, 충청도에서 온 김가라 하오.”“나의 본관은 밀양(密陽)입니다.”박달이 박가라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동본(同本)은 아니나 같은 성씨이니 반갑소이다.”과거에 낙방한 처지라 세 사람은 금방 마음이 통했다. 박달이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자 흔쾌히 손을 내주었다. 박가라는 사람이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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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2.10.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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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 낙방하다“서방님, 빨리 오세요. 너무 기다리게 하지마시고요. 아셨죠?”“알겠소. 내 얼른 다녀오리다.”“가보나 마나입니다. 서방님 오시는 대로 문을 닫고 잔치를 벌이려고요. 제가 아는 언니들과 동생들도 와서 축하해 주기로 했어요.”“아지, 너무 일을 벌이는 거 아니오?”“걱정하지마세요. 오늘이 서방님과 제 생애에 최고의 날인데 그까짓 하루 쯤 영업하지 않는다고 달라질 거 없어요.”아지는 생글거리며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이 물오른 살구 같았다.“그래도. 남들이 알면 비웃음을 살 거 같아서 그래요.”“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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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2.09.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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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를 보면호소향배추를 보면 어머니의속고쟁이가 생각난다나일론 속치마는 헛것이라며노상 걸치고 아끼시던넉넉하고 촌스런 어머니의속곳들이 떠오른다거칠거칠 풍겨오는 어머니의손등 냄새처럼 배추 잎마다한 잎 한 잎 속속들이고향 흙냄새가 배어온다꼭 우리 어머니처럼맵시라곤 전혀 없이 불룩한속고쟁이를 속곳 위 단속곳 밑에겹겹이 걸쳐 입은 통배추그 넉넉한 속살 속엔 세상살이슬픔이며 아픔이며 인고의 물기가아리아리 배어서오히려 입동의 아침이 싱싱하게 다가오는 것인가속속들이 품안으로노오란 고갱이들을 자식처럼 아껴 품고이 추운 세상 견디기 위해여러 겹 다독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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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서영
2022.09.2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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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처녀 임신하다“서방니임-, 꼭 안아주세요. 더욱 꼭 -.”극락의 여주인이 문을 열다가 대취한 박달과 아지가 한 몸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고 얼른 문을 닫고 문틈으로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훔쳐보았다.‘남들 사랑놀이를 보니 나도 몸이 달아오르네. 염병, 저년은 하필 오늘 사내를 꾀어가지고 와서 내 가슴에 불을 지핀담.’극락 여주인은 마른 침을 넘겨가며 아지와 박달의 뜨거운 장면을 계속 훔쳐보았다.“아니 되오.”아지의 입술을 훔치고 있던 박달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서방님, 갑자기 왜 그러셔요?”“아니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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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2.09.17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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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 주지육림에서 놀다“서방님, 시장하시죠? 잠시만 기다리세요.”“괜찮아요.”“이곳은 한양에서도 음식과 술이 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랍니다. 오늘 과거를 치르시느라 고생하셨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 잔 하시고 푹 쉬세요.”아지는 분명히 이번 과거에 박달이 합격하였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교자상이 들어왔다. 상위에 차려진 음식에 박달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박나물, 취나물, 가지나물, 고추조림, 취나물, 두부조림, 찐 달걀, 편육, 닭백숙, 돼지족발, 신선로, 구이, 튀김, 화채, 탕, 산적, 잡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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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효
2022.09.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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