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 생산

▲주안염전(왼쪽)과 주안염전 채염 모습.
소금은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따라서, 소금을 얻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은 해수(海水)를 끓여서 만드는 자염(煮鹽)이 었다. 하지만, 자염은 생산을 위해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끓여야 하는 속성 때문에 연료비나 인건비 등의 경비가 과다하게 지출되는 문제가 있었다.

인천 개항 후 일본은 당시 조선에 수입되어 보급이 확대되고 있던 값싼 청국의 천일염을 의식해 천일염전을 개발하고 이를 전매체제로 통제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려 했다.

 1907년 일본 대장성의 조사와 자문에 기초해 인천의 주안면 십정리에 최초로 시험용 염전 1정보(9,917㎡=3,000평)를 축조했는데, 중국, 대만보다 양호한 천일염이 생산됨에 따라 1909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안염전은 지금의 서구 가좌동과 부평구 십정동 일대로 지형·기후·토질 등 천혜의 조건과 경인철도를 통해 신속한 물류 이동이 가능한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염전의 성공을 계기로 남동, 소래 등으로 급속히 확대됐고, 1933년경 인천의 염전은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인 15만 톤을 생산해 낼 정도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소금이 과잉생산 되면서 소금값이 폭락했고, 염전업자들은 적자 운영에 시달리게 됐다. 결국 정부의 폐염 권장과 산업단지 조성으로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염전인 주안염전은 사라져 갔고,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1980년대 남동염전, 이후 소래염전마저 1995년 수인선 폐선과 더불어 폐염되고 말았다.

주안지역은 그 이후 수출공단으로 변모하면서 우리나라의 산업을 선도하는 지역으로 발전하였고, 지역상권 활성화에 따라 신흥도시의 문화 중심축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시 관계자는 “인류의 생활에 필수적인 소금의 최다 생산지였던 인천이 그 원동력을 바탕으로 이 시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내는 잠재력을 발휘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료 인천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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