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성기의 연평도 파시 풍경(1948)
‘파시(波市)’란 글자 그대로 ‘물결[波]’을 타고 바다에서 열리는 ‘시장[市]’을 일컫는 말이다. 일찍이 연평도는 흑산도파시, 위도파시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파시로 꼽혔다.

 ‘파시’란 말이 처음 나타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연평도 파시에 관해 “해주 남쪽 연평평(延平坪)에는 석수어(石首魚)가 나서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어선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년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들은 우리나라 서해안으로 북상, 2~3월에 흑산도, 3~4월에 안마도와 위도를 지나 5~6월에 연평도에 어장을 이루는데, 회유하는 수십 억 마리의 조기를 따라 형성되는 시장이 곧 ‘파시’인 것이다.

 발동선의 보급과 어구·어망의 개량으로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이 크게 늘어날 당시 연평도는 ‘석수어의 왕국’, ‘전조선의 찬장’, ‘서조선의 대보고’등으로 수식되며, 조기 어업의 중심지였다.

파시철이 되면 연평도는 “사흘 벌어 1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돈이 흔한 곳이 되었다.

▲1950년대 연평도
어선들이 갑판 위까지 가득 조기를 싣고 섬으로 들어오면 곧 바로 판매가 이루어졌고, 1년 내내 조용했던 섬마을에는 선박수리를 위한 공장, 생필품 잡화점, 임시우체국과 주재소, 요릿집, 주막, 목욕탕 등의 임시가옥이 세워지면서 하나의 도시가 생성되었다.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1946년 22,500톤의 어획을 올려 정점을 이루었으나, 1950~60년대에 1만톤을 넘나들 정도로 감소되면서 조기 파시는 막을 내린다.

유자망, 기선저인망 등의 어구를 갖춘 대형화된 동력선들의 마구잡이 어획으로 참조기의 씨가 말라 버린 것이다.

인천시에서는 지난 5월 참조기 치어 35만미를 포함해 2013년부터 모두 125만미를 연평도를 비롯한 인천 연안에 방류하는 등 참조기 자원 회복과 제2의 연평도 파시 복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 관계자는 “우리나라 3대 파시의 명성을 드높였던 연평도 파시가 부활하여 인천이 수산업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데 큰 역할을 해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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