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나름의 특징이 있었다.

바다와 근접해 ‘물’의 의미가 담긴 비류의 미추홀(彌鄒忽)과 매소홀(買召忽)로부터 ‘도읍’이었던 의미가 담긴 소성현(邵城縣), 고려 ‘왕실’과 관련되었던 경원군(慶源郡), 인주(仁州), 그리고 조선 태종 13년(1413) 10월 15일 인천(군)으로 개칭됐다.

특히, 신라때 소성현으로 불리던 인천이 고려 숙종대(1095~1105) ‘경원군’으로 개칭된 것은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태후 이씨(仁睿太后李氏)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인예태후는 인천지역 호족으로 중앙에서 활동했던 인주 이씨 이자연(李資淵)의 맏딸로서 문종의 왕비가 되었는데, 문종과의 사이에서 10왕자와 4공주를 낳았다.

숙종은 그 어머니의 고향이 경사의 근원이라고 하여 경사 ‘경(慶)’과, 근원 ‘원(源)’을 써서 경원군으로 승격․개칭하였다. 또, 숙종의 손자인 인종(1122~1146) 역시, 그 어머니의 고향인 인천을 군(郡)에서 주(州)로 승격시키고 명칭을 ‘인주(仁州)’로 변경했다.

나말여초(羅末麗初)에는 각 지역 호족세력이 등장하면서 경주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지방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됐다. 호족(豪族)들은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귀족으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인천 지역의 호족이었던 인주 이씨는 고려시대에 중앙귀족으로 활동하면서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李子淵) 때에 세 딸이 모두 문종비가 되자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80년 동안 중앙정치계에서 핵심세력이 됐다.

그러므로 인천은 순종·선종·헌종·숙종·인종 5대 왕의 외향이었고, 문종·순종·선종·예종·인종 5대 왕비의 내향이었다. 특히, 순종·선종·인종 3대는 왕의 외향인 동시에 왕비의 내향이기도 했다.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인천은 다시 경원부로 환원․승격되었는데, 이것은 조상을 현양하고 쇠락해 가는 고려 왕실을 높이려는 상징적 의미였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인천부읍지'등에는 그 이유를 ‘칠대 어향(七代御鄕)’이라 표현하고 있다.

어향(御鄕)은 ‘왕의 고향’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뜻을 확대하여 7대(문종~인종) 동안 인천이 왕실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칠대 어향’이라 불렀다.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