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 조선수사해방학당 기숙사(왼쪽)와 본관 터
 1893년 고종은 해군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을 강화도에 설치했다.

이에 앞서, 영국 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1892.12), 해군학교 설치령도 반포했다(1893.3). 그리고 경기와 인천 연안의 방비를 총괄하는 군영의 명칭을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으로 바꿨다.

조선수사해방학당은 총제영에서 설치했다 하여 ‘총제영학당’이라고도 불렀다.

15세 이상과 20세 이하의 생도 38명과 수병 300여 명을 모집해 정식 개교한 후 먼저 영어교육을 받게 했다. 군사교관으로는 영국 정부로부터 콜웰 대위와 조교 커티스 하사가 파견돼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학당과 군영 설치를 경계했다. 1894년 3월 2일 해군대위 미나미[南義親]가 이를 정탐하고 보고한 첩보문서에는 조선수사 해방학당의 건물 규모, 위치, 생도, 교육법 등과 강화도의 해군력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담겨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학당은 생도의 수업을 담당했던 학교 본관 구역과 교관 또는 생도들이 생활했던 기숙사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본관 구역은 장방형의 담장 안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사당(敎師堂)과 을호생도 기숙사로 구성되어 있었고, 건물들은 서양식 외관의 길쭉한 형태였다. 기숙사 구역은 갑호생도의 기숙사와 영어를 가르치던 영경교당(英經敎堂)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사해방학당은 군사교육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국내외 압박이 심해지면서 유명무실한 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록, 고종의 해군력 증강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후 군함 도입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

학당이 자리했던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61번지 일대는 현재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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