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아, 미추홀이여

“어하라, 왕자님, 어서 배안으로 피하소서. 풍랑이 너무 거세 자칫 바다로 추락하실까 우려되옵니다. 어서, 어서 안으로 드소서. 길을 잘못 인도한 소신들이 바다에 빠져 죽겠나이다.”

소서노어하라와 비류는 대신들의 간곡한 청에 배안으로 들었다. 선단 후미의 배들은 파도의 출렁임에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들려왔으나 바람소리에 곧 묻히고 말았다.

비도 내리지 않는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도 가세하였다. 배와 배가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소서노어하라는 울면서 엎드려 천지신명과 마고할미께 살려달라고 기도하였다. 어하라의 기도 덕분인지 동이 틀 때 쯤 바람은 잠잠해졌다.
“비류와 대신들은 피해 상황을 파악하여라.”
밤새 혼이 나간 소서노어하라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머리는 산발한 채 마치 미친 여자 같았다.
“나의 백성들, 나의 백성들은 어찌되었느냐? 어서 파악하여라. 어서.”

“어하라, 아룁니다. 간밤의 풍랑으로 배 열두 척이 침몰하였고 열네 척은 심하게 부서졌습니다. 바다에 빠진 백성들이 모두 천여 명쯤 되옵니다. 또한 유실된 재물은 황금 십만 냥과 식량 천 석, 병장기가 다수입니다.”
“무어라? 천여 명? 그럼 지난번 물을 구하러 육지에 오르다 몰살당한 천 명을 합치면 이천여 명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냐? 아 아, 어떻게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은 정녕 나를 버리신 것인가.”

소서노어하라는 뱃머리에 서서 남쪽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하늘은 그 사람을 크게 쓰기 위하여 극심한 고통을 주어 시험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분명 하늘의 계시이며, 암묵적으로 어머님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난일은 빨리 잊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머니 건강에 이롭고 어머니를 따르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하늘의 계시이며, 신뢰라. 하하하, 우하하하….”
“어머니.”

소서노어하라는 반쯤 미치광이가 된 것 같았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비류와 대신들은 소서노어하라가 무서웠다. 머리칼은 번개에 맞은 것처럼 쭈뼛 서 있었고 두 눈에서는 강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바다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다를 향해 한마디씩 욕을 내뱉었다. 해가 중천에 오를 즈음 소서노는 남아 있는 배를 모두 가까이 모이게 하였다.
“모두 들으시오.”
붉은 갑옷을 입고 물소 뿔로 만든 강력한 쇠노(弩)를 어깨에 멘 소서노어하라는 침착한 소리로 외쳤다. 마치 하늘에서 막 강림한 신장(神將)의 모습이었다.

“나, 소서노는 간밤에 하늘의 계시를 들었습니다. 비록 풍랑으로 많은 백성들을 잃었지만 우리들이 뜻하는 바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마한의 우체모탁국에 이삼일 후면 도착합니다. 나는 살아남은 칠천여 명을 이끌고 육지에 상륙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나 소서노를 믿고 의지하십시오. 나를 의지하고 나를 따르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나, 나를 의심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우체모탁국 미추홀에 상륙하여 잠시 심신을 추스른 다음 마고할미와 불두칠성에게 천제(天祭)를 지낼 것입니다. 나를 믿고 따르십시오. 당초 우리는 혈구진에 상륙하여 마한 주변국들의 정세를 파악하려 하였으나, 곧바로 우체모탁국으로 갈 것입니다.”
“어하라님 만세.”

대신 중 한 사람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만세를 외치자 나머지 사람들 모두 따라하였다.
“소서노어하라님 만세.”
“비류왕자님, 만세.”
“우리들의 영도자 소서노어하라님 만세.”
“어하라님, 만만세......”

지난밤의 악몽을 씻어버린 소서노어하라와 대신들, 살아남은 백성들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배 88척은 유유히 남쪽으로 순항하였다. 갈증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 서너 명이 죽음을 맞이하였으나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또 사흘이 지나갔다. 찬란한 아침 해가 동녘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저기, 미추홀이다. 목적지가 보인다.”

맨 앞에서 순항하던 사람들이 소리쳤다.
“뭐라고, 미추홀이라고?”
“어하라, 우체모탁국 미추홀이 보인답니다. 어서 뱃머리에 가셔서 미추홀을 살펴보소서.”
“오오, 우리가 그리던 미추홀이더란 말이냐. 미-추-홀.”
‘아아, 천지신명이어, 마고할미시여. 고맙습니다. 저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소서노어하라의 양 볼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머니, 방금 온조 아우가 보낸 전서구가 왔습니다.”
“오오, 그래? 온조가 살아 있었구나. 아 아, 천지신명이시여, 마고 할미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전서구가 가져온 편지를 어서 읽어보아라. 어서.”

“어머니, 온조 아우가 이끄는 일천의 기마병들이 왕과 신지, 견지, 험측, 부례 등 우체모탁국 지도층을 모두 포로로 잡아두었답니다. 어머니와 저희들은 미추홀에서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천혜의 포구가 있답니다. 그 포구는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쫓기던 동이족 중 소씨(蘇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상륙하여 사로국(斯盧國)으로 진출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사로국이라면, 진한에서 가장 으뜸인 나라가 아니더냐? 듣기로는 북부여 황실의 여인 파소(婆蘇)의 아들 박혁거세가 건국한 나라라고 하던데.”

“어머니, 맞습니다. 소벌도리(蘇伐都利)의 지원으로 파소의 아들혁거세가 세운 나라가 사로국입니다. 소벌도리를 비롯한 많은 소씨 사람들이 그 포구를 통해 진한으로 진출하였습니다.”
“소씨들이 들어온 곳이 그 포구가 맞는다면 이제 내가 왔으니 이름을 바꿔야하겠구나. 소(蘇)자 대신 소(召)로 말이다.”

“어머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미추홀도 얼마 후면 매소홀(買召忽)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될 테지요. 어머님이 우체모탁국 왕에게 황금을 주고 전초기지를 사시게 되면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정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온조 아우가 미리 손을 써서 우체모탁국을 접수하였으니 그럴 필요는 없을 테지요. 하하하하….”
“그래도 미안하니 얼마의 돈은 줘야지.”
“포구에 도착하였다. 병사들과 백성들은 천천히 하선하라.”

소서노어하라 일행이 도착한 곳은 300여 년 전 소씨(蘇氏) 성을 가진 소씨족과 역시 제(濟)와 진(秦)나라의 정복 전쟁에 쫓겨 온 래이(萊夷)족들이 대거 반도로 들어온 곳이었다.
“어머니, 저기 온조 아우와 기마대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아아, 온조야, 내 아들 온조야, 장하다. 이 어미는 오늘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너희 아비, 우태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이제 이곳 포구를 통해 우리는 아리수 중심부로 진출하여 천년 제국을 건설하자.”

소서노어하라는 육로를 이용해 미리 도착하여 허약한 우체모탁국을 단숨에 무너뜨린 온조 일행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포구에 상륙하였다. 상륙한 즉시 소서노어하라는 인근 산에 올라 마고 할미와 북두칠성신에게 천제를 지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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