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문(왼쪽)과  인천축항 선거 준공 기념엽서
 인천항이 개발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은 개항(1883) 직후인 1884년 9월 인천상인단체의 출자에 의해서였다. 당시는 현 올림푸스호텔 언덕 아래 해관 자리 앞 해안에 석축을 쌓고 잔교(棧橋) 1기와 돌제(突堤) 1개를 만들었는데, 항만으로서는 초보적인 시설에 불과했다.

1893년 두 번째 개발사업으로 영국인 기사 챔버스의 설계에 따라 해관 앞의 바다를 메워서 돌제를 축조하고, 소월미도 동쪽 끝과 팔미도 서쪽 끝에 등대를 설치하는 등 항로 표지시설을 갖췄다.

인천항은 청일전쟁(1894) 이후 미곡 반출의 창구로서 이용되었기 때문에 투자가 집중되어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수도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경인철도의 개통(1900)으로 무역액에서 수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러일전쟁(1904~05)이 끝난 후 인천항뿐만 아니라 모든 항구에서의 무역량이 급증하게 되자 전국의 항만시설 개선이 필요하게 됐다. 더구나 경부선 철도의 개통(1905) 이후 인천항은 점차 물동량에서나 항만시설에서 부산항에 추월당하고 있었다.

항구적인 항만시설을 갈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자 만조 간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대소선박이 입항할 수 있는 독(DOCK, 船渠) 시설에 대한 요구가 간절했다.

당시 서해안의 10m가 넘는 조수간만 차이는 인천항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문제였고, 이에 따라 1911년부터 항만의 설비확장공사를 실시했다.

축항계획은 ‘2중갑문식 선거’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선거(船渠) 구축을 위해 사도와 세관매축지 남쪽에서 오늘날 인천여상이 자리잡고 있는 동산에 이르는 해면을 매립하고 선거는 이 매립지 중앙을 굴착하여 설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곳에 4,500톤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규모의 인공(人工) 항만 제1선거 축조를 시작했다. 이 항만은 최초의 근대적 갑문식 독(DOCK) 공사로 착공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큰 관심을 끌었으며 공사 시작 7년여 만인 1918년 10월 완공됐다.

 이어 내항(內港)으로 토사가 밀려들어 쌓이는 것을 막고, 배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1917년 시작한 월미도 제방축조 공사가 1923년에 끝남에 따라 인천항은 전천후 상업항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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