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연의 서막

초저녁부터 소쩍새가 피를 토하며 울어대자 마을은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저녁 무렵 한차례 비가 내린 뒤여서 늦봄의 산은 방금 연둣빛 치마로 갈아입은 새댁의 모습이었다. 청년은 답답한 느낌에 방문을 반쯤 열었다. 하얀 반달이 중천에 박혀 있는 듯 했다.

멀리 금성산 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청년이 아무리 잠을 청해보아도 수마睡魔는 도무지 찾아올 줄 몰랐다. 청년은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소쩍새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정적에 빠진 마을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청년은 동구 밖으로 나와 으스름한 들길을 걸었다.

귀신에 홀린 듯 청년은 무의식중에 뱀골 가는 논길로 들어섰다. 달빛에 젖은 밤꽃이 마치 나뭇잎에 눈이 쌓인 듯 여기 저기 무더기로 피어 있는데 어찌나 자극적이고 묘한 냄새를 풍기는지 청년이 코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산기슭에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 초가지붕이 달빛을 받아 검푸르게 보였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개구리 우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 올 뿐 산골은 깊은 잠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꿈결인 듯 꿈결이 아닌 듯 청년이 들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을 때 푸른 어둠 속에서 희뿌옇게 빛을 발하는 뱀골의 초가와 기와지붕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하였다. 초가들은 어깨를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마을 한가운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청년의 눈에 익은 집이 분명했다. 뱀골에서 뿐만 아니라 충청도 아산牙山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소문난 전라도 보성군수를 지낸 명궁 방진方震의 집이었다. 청년은 꿈길을 걷듯 밤이슬이 발에 채여 바짓가랑이가 흥건하게 젖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산모퉁이를 돌자 사방으로 검푸른 들녘만 보일 뿐이었다. 그제야 청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달빛이 누렇게 변하면서 별똥별이 빈번히 길게 꼬리를 감추고 떨어졌다. 청년은 집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달이 서산 아래로 기울면 혹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청년은 걸음을 멈칫 거리며 주저하다가 이내 뱀골로 향했다. 청년은 대궐 같은 방진의 집에 시선을 집중하며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유도 없이 가슴이 뛰는 걸 느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청년이 마을에 들어서자 민가의 개가 인기척에 놀라 청년을 향해 짖기 시작하면서 마을 개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목청을 높였다. 청년이 혀를 끌끌 차며 개를 구슬려 보려고 하자 개는 더욱 사납게 짖어댔다. 청년은 얼른 마을 안으로 들어서서 방진의 집 쪽으로 부리나케 걸으며 몸을 숨길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방진의 집 뒤로 거의 다 쓰러져 가는 헛간 같은 곳이 나타나자 청년은 그곳으로 몸을 숨기고 개들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달이 서산에 가까이 기운 것으로 보아 축시丑時가 훨씬 지난 시각일 듯 했다. 청년은 헛간에 앉아 서애西厓 유성룡의 말을 곰곰이 반추해 보았다.

유성룡은 지난해 문과에 입격해 진사의 신분으로 곧 있을 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청년은 한양 마르내골(건천동)에서 죽마고우로 함께 유년을 보낸 유성룡의 말에 수긍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었다.

‘여해汝諧가 갑주甲冑를 입고 외적을 막고, 내가 필묵으로 나라 살림을 맡으면 이 조선 삼천리강토는 대대손손 평안할 걸세.’ 유성룡의 말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수가 되어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청년의 5대 할아버지 이변李邊은 세종 임금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성종 임금 때 성균관 대제학을 거쳐 정1품 영중추부사를 역임했으며, 고조부 이거李琚는 연산군이 세자시절 스승이었고 정3품 병조참의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부터 가세가 기운 것에 대해 늘 애통해 했다. 아버지 이정李貞 또한 백수나 다름없어 현재의 상태로는 고려시대부터 삼한갑족이던 덕수이씨 정정공파貞靖公派 계열의 가문을 번듯하게 일으키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각오해 오던 터였다.

같은 덕수이씨이며 부원군파府院君派인 율곡 이이李珥가 지난해 식년문과에서 당당하게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며,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실에 청년은 은근히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청년은 유성룡의 말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성룡은 마치 청년에게 주문을 거는 듯 반복해서 조선을 위하여 문무를 나누어 경영하자고 하였으나 청년은 유성룡의 말이 거북스럽기만 했다. 물론 유성룡은 청년과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하던 막역지우였지만 자신이 먼저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을 하니 청년을 깔보는 말투로 들리기도 하였다.

다음날 청년은 운종가雲從街 피아골 주점에서 역시 죽마고우인 선거이宣居怡와 홍연해洪漣海를 만났다. 세 사람은 2년 전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돌아온 절친한 사이였다.

“여해, 자네는 문과文科로 입신출세하는 것 보다 무예를 익혀 무과에 입격해 무장武將이 될 팔자야. 그때, 자네 장래에 대해 예언했던 도사를 잊었는가?”
홍연해의 말에 청년은 2년 전 일을 떠올렸다.

세 청년이 심신을 단련하고 고승대덕을 만나 인생 공부를 할 요량으로 금강산을 찾은 적이 있었다. 청년이 한창 공부에 열중하던 중 머리를 식힐 겸 금강산 천선대天仙臺에 올랐다. 갑자기 사방이 짙은 운무에 휩싸이더니 보랏빛 운거雲車를 탄 한 선인仙人이 청년 앞에 나타났다.

“나는 진의 노생盧生인데 이곳 조선의 금강산이 산세 수려하고 청정하여 잠시 머물고 있노라. 그대는 북두칠성의 두 번째 별인 하괴성河魁星의 정기를 받은 몸으로 무인武人의 기질을 타고 났다. 머지않아 조선이 환란에 휩싸일 때를 대비하여 무예를 익혀야 한다.”

청년은 감히 선인仙人을 쳐다볼 수 없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도인이 사라지자 청년은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현실이 분명했다. 청년은 선인이 나타난 이야기를 벗들에게 들려주었다.

문반이 전통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조선에서 문과를 공부해 온 청년에게 문반에 비해 하대下待를 받고 있는 무반의 길은 퍽 내키는 출세 길이 아니었다. 선조들처럼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되어 쓰러져 가는 가문을 일으키는 게 청년의 꿈이었다. 그러나 벗들은 청년의 속을 모르고 자꾸만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청년이 금강산에서 비몽사몽간에 도인을 만나고 난 뒤부터 굳은 결심이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벼슬을 하지 못하고 백수白首로 살아가는 일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좀 모자라거나 일부러 글공부와 담을 쌓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청년이 마르내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때 늘 병정놀이를 즐기곤 했었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었다. 두 동무들의 권유는 청년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세상은 칠흑으로 변했다. 세상을 희미하게 밝혀주던 달이 서산 뒤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동네 개들도 잠이 들었는지 고요했다. 청년은 헛간에서 나와 사방을 살폈으나 다행히 아무도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청년은 지난 설날에 우연히 뱀골에 놀러 왔다가 한 규수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여러 날 가슴앓이를 하다 외사촌들 도움으로 그녀가 방진의 무남독녀 연꽃아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년은 연꽃아씨의 고운 모습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거대하고 시커먼 물체가 떡 버티고 있었다. 별빛이 촛불보다 흐리지만 산촌의 모습을 대충은 알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지붕이 낮은 어느 초가에서 곤한 잠에 떨어진 사내들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한양에서도 내로라하는 가문의 미모가 빼어난 규수들을 자주 봐온 터라서 웬만한 미색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청년은 방진의 집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 마다 청년은 마치 밤손님이 된 것처럼 지은 죄도 없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대 대장부로 태어나 호기심과 관심이 있으면 낮에 당당히 찾아가야 하지만 아직은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방진의 집 육중한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한양 마르내골에서도 보기 힘든 대저택이었다.

캄캄한 밤이지만 행랑채 지붕의 기와는 밤이슬에 젖어 희미하면서 약간은 검푸른 빛을 발산하였다. 청년은 잠시 대문을 바라보면서 마르내골에 당당히 서있는 자신의 집 대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대손손 살아온 집은 고색창연한 빛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지만 증조부 때부터 집의 외관이 점점 퇴색하고 있었다.

방진의 집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대문이며 기둥이 단단하고 옻칠이 되어 있어 금방 물속에서 건져 올린 나무를 깎아 지은 집 같았다. 청년은 혹시 집에서 자신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집을 한 바퀴 휘둘러보고 갈 요량으로 어른 두 사람 키보다 높은 담장을 지나 안채 뒤꼍을 돌다가 청년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느티나무로 보이는 큰 고목 아래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나무 뒤편 담장이 낮아서 웬만한 어른이라면 나무아래 광경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청년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불빛이 발산되고 있는 나무 아래를 보고 싶어 했다. 숨을 죽이고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게 담장을 따라 다가갔다. *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