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연꽃 아씨

“앗, 저 낭자는 그때 봤던 그 연꽃아씨가 아닌가?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정화수를 떠 놓고 지성을 드리고 있다니.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나?”
촛불을 켜놓고 합장한 채 연꽃아가씨는 정성을 다해 빌고 또 빌며, 천지신명을 찾고 있었다.

첫눈에 청년의 마음을 빼앗아간 방씨댁 규수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에 청년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청년을 숨을 죽이며 연꽃아씨의 들릴 듯 말듯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으나 너무 희미하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섞여 정확한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속삭이는 목소리 중간 중간에 인연, 만남 혹은 연분 등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는 염원이 짙게 배인 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청년은 조금 전에 느꼈던 호기심이 금방 식으면서 ‘괜히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연꽃아씨의 간절한 염원은 분명 어떤 사내를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청년의 온몸에서 기운이 밀물처럼 빠져나가더니 발걸음조차 휘청거렸다. 밤이 이슥하도록 지성을 드리는 연꽃아씨 모습이 가련하면서도 그 대상이 되는 사내가 얄미웠다.

‘도대체 어떤 사내를 위하여 저리 치성을 드린단 말인가.’
점점 기울어 가는 가세에 청년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경제적 압박에 불편을 겪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마르내골은 예로부터 조정에 나가 큰 벼슬을 하는 내로라하는 가문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양천 허씨, 안동 김씨, 한양 조씨 등 당상관堂上官 이상 벼슬아치들을 많이 배출한 가문들이 밀집된 부촌으로 한양에서 웬만한 가문은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청년의 집안도 순천부사를 지낸 증조부 이거 이후로 거의 50년 동안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관계로 살림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높은 벼슬로 거들먹거리며 떵떵거리는 사대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아버지 이정李貞의 힘이 너무 미약했다. 증조부가 모아 놓은 재물도 상당히 줄어들어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이웃들과 비슷한 생활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외조부와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로 일가 일부가 외가인 아산牙山으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청년이 벗들을 만나거나 공부를 하는 공간은 여전히 한양 마르내골이었다.

백암白岩으로 돌아가는 청년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청년은 촛불에 선홍빛으로 물든 연꽃아씨의 화사한 모습을 떠올렸다. 지성을 드리는 장면을 훔쳐 본 뒤 청년의 속마음은 복잡해졌다. 아산에서 제일가는 토호이며,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 휘하에 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무리들은 대개가 힘깨나 쓰는 무골들이어서 청년이 지향하는 바와 거리가 있었다.

청년은 새벽에 자신이 왜 뱀골까지 왔다 돌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집을 나설 때는 일말의 아련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꽃아씨의 지성 드리는 모습은 청년의 기대를 무참히 꺾어버리고 말았다. 청년이 백암리에 돌아왔을 때 동이 트고 있었다.

집에서 아무도 청년이 집을 나간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여명에 촉촉이 젖은 마을에 들어서자 잠이 없는 노인들이 논에 들어가 잡초를 뽑는 모습이 보였다.

‘천장강대임어시인야天將降大任於是人也 필선고기심지必先苦其心志하며, 노기근골勞其筋骨하며, 아기체부餓其體膚한다. 하늘이 장차 큰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 그 근골을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한다.’

‘공핍기신空乏其身하야 행불란기소위行拂亂其所爲하나니 소이동심인성所以動心忍性하야 증익기소불능曾益其所不能이니라.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성질을 참게 하여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더욱 하도록 위해서 이다.’
백암 마을에 초저녁부터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한양에서 이사 온 이씨네 집에서 흘러나오는 글 읽는 소리는 마을의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한 평생 땅만 파고 살던 사람들에게 글 읽는 소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소 워낭 소리나 초저녁에 개 짖는 소리 혹은 새벽을 알리는 닭 우는 소리에 익숙해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이씨네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신선하게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농사만 짓는 동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청년을 비롯하여 부모형제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였다.

마을 대소사에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는 빠짐없이 참석하였고 형제들도 마을 청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양에서 내려왔다고 거드름이나 피우는 잔반殘班이 아니었다.

물론 청년 외할아버지 댁의 영향력이 마을에 작용하였지만 마을 사람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전적으로 청년과 부모형제의 노력 덕분이었다. 네 형제 중 세 번째인 청년의 역할은 마을의 남녀노소의 마음을 얻고 있었다. 집안에 마을 소년들을 불러 모아 천자문이나 소학을 가르치며 몽매한 농촌을 눈 뜨게 하였다.

청년은 두 형과 아우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컸다. 떡 벌어진 어깨와 짙은 눈썹, 붉은 입술, 하얀 얼굴은 어쩌다 마을 처녀들과 마주치면 대부분 처녀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청년의 훤칠하고 고매한 성품은 백암뿐만 아니라 근동近洞에 소문이 났다. 특히 마을에 혼기가 찬 여식을 둔 부모들은 이씨네 자제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사대부들이 살던 마르내골에서 대대손손 살다 사정상 아산으로 내려온 이정과 초계 변씨는 슬하에 4남1녀를 두었다. 청년의 큰형은 얌전한 서생의 전형으로 이름은 희신羲臣이며, 중형仲兄인 요신堯臣 역시 조용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로 늘 수불석권하였다. 청년의 아우 우신禹臣은 어릴 때부터 약골로 늘 어머니 변씨 속을 태웠다.

마르내골에서 살 때부터 우애가 깊은 네 형제가 서당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백수나 다름없는 아버지 이정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네 아들들 보기가 민망했다. 선조들이 피땀 흘려 이룩해 놓은 재물과 가문의 명성이 자신의 불출세不出世로 시들어 간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권문세가들이 한량인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뿐더러 은근히 업신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이웃들의 경조사에 모르는 체 할 수도 없어 그들의 생활수준에 맞는 하례에도 상당한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자신의 본거지인 한양을 떠나 처가가 있는 아산 산간벽지로 생활 기반을 옮기는 일은 자존심이 남달리 강한 이정에게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닌 이상 이정은 네 형제에게 가문의 미래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아산牙山에 칩거하다 시피하면서도 이정은 종종 한양을 오르내렸다.

그때 마다 이정은 네 형제 중 가장 신체가 단단하고 성품이 침착하며 범상한 기품을 지닌 청년을 대동하였다. 아버지의 총애는 형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청년은 늘 겸손했다. 청년은 마르내골에 살 때부터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병정놀이를 즐기곤 하였는데, 그때 마다 대장 노릇을 하였다. 나이는 십세 중반이지만 아이들의 놀이는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병정놀이가 아니었다.

소년의 지휘 아래 병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상대편을 제압하는 등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만약 병졸 등이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병정놀이를 훼방하는 어른이 있다면 소년은 가차 없이 겁박하거나 살의 가득한 눈초리로 쏘아보아 어른들도 감히 참견하지 못했다. 자연 마르내골 뿐만 아니라 남산골에서도 소년이 대장으로 있는 병정놀이가 벌어지는 날이면 구경꾼들이 새카맣게 모여들곤 했다.

한번은 청년이 한양에 다녀오다 늦은 밤 아산에 도착하여 백암리로 향하는데 동네어귀에서 불량배들을 만났다. 불량배들은 청년이 한양에서 내려와 온 동네 처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샘이 나자 단단히 혼내 주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대여섯 명의 장년들이 청년을 에워쌌다. 그러나 청년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침착하게 사방을 주시하였다.

“어이, 이봐. 이 마을에 살러왔으면 토박이 형님들에게 먼저 인사가 있어야지. 이거 너무한 거 아녀? 그리고 마을 처자들 마음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면서? 오늘은 우리가 자네 인사를 받아야 겠어.”

덩치가 깍짓동만한 사내가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퍽’하는 소리와 함께 거구가 나뒹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사내가 나뒹굴자 이번에는 나머지 사내들이 우르르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청년이 공중으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나머지 사내들이 배를 움켜잡고 뒤로 자빠졌다. 청년의 일당백 무예와 기세에 눌린 마을 장정들은 비실비실 거리며 도망가려고 하였다. 청년은 그들을 가로 막고 모두 땅바닥에 꿇어 앉혔다.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자에게 청년이 이름과 나이를 묻고 악수를 청했다. 어차피 이들과 좋으나 싫으나 오랫동안 부딪히며 살아갈 이웃들이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앉아있던 마을 장정들을 일어나게 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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