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르내골 서당

“나를 여해라 불러주오. 내 이 마을에 놀러온 것이 아니고 뿌리를 내리려고 한양에서 내려왔소.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도 가급적 마을 분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오래오래 살고자 하오. 나와 우리 가족들을 적대시 하지 마시오. 그대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우리가족 모두는 발 벗고 나서서 도울 것이오. 또한 우리 가족들이 곤란에 처했을 때 역시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할거요. 앞으로 우리 동무로 잘 지냅시다.”

청년과 마을 장정들 간에 한바탕 소동이 있고난 뒤로부터 마을 장정들이 청년을 찾아와 동무가 되기를 청했다. 청년은 마을에서 비슷한 나이 또래 사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로 있다가 동무 둘을 얻으면서 차차 마을의 또래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청년이 한양에서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을 모아놓고 훈장 노릇을 했던 경험을 되살려 마을에 서당을 개설하였다.

마을 원로들은 땅을 파먹고 살기에도 바쁜데 무슨 공부냐며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반면 중장년층은 청년 여해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청년은 외가에서 도움을 받아 마을 한복판에 집을 짓고 밤에만 공부를 가르치는 서당을 열었다.

처음에 마을 소년 서너 명이 출석하더니 차차 청년이 지도 방법이 소문이 나면서 이웃 마을 소년들까지 몰려들어 마을은 밤늦게 까지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아우야, 너 혼자 서당일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형들이 함께 하기로 했다.”
청년의 큰형 희신과 둘째형 요신은 아우 혼자 마을 청소년들 가르치는 일이 무척 힘들게 보여서 힘을 모으기로 하였다.
삼형제의 선행은 인근 마을뿐만 아니라 아산에 널리 퍼지면서 공부를 하겠다는 몰려오는 청소년들로 북적였다. 서당의 수업은 주로 가을부터 이듬해 봄 모내기 까지 이루어지는데 물론 수업료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추수가 끝나면 공부하는 청소년들은 볏섬이나 잡곡을 짊어지고 와서 삼형제에게 수고비로 내놓기도 하였다. 청년이 논어와 맹자를 가르치고 큰형 희신이 천자문과 소학을 둘째형 요신이 동몽선습을 가르쳤다. 물론 청년의 두형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훈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청년은 여전히 한양을 오가며 마르내골 벗들과 친분을 이어갔다.

추수를 마치자 뱀골의 토호 방씨 댁에서 데릴사윗감을 구한다는 소문에 청년의 마을뿐만 아니라 근동까지 퍼졌다. 상당한 재력가이며 전라도 보성군수까지 지낸 방진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출세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방진의 무남독녀 연꽃아씨는 출중한 미색으로 아들을 가진 부모들은 누구나 한번쯤 방씨네와 사돈을 맺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매파들이 쉴 새 없이 방진의 처, 남양 홍씨를 만나 사윗감을 소개하였지만 방진과 방진의 처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매파들이 백암에도 다녀갔지만 청년의 집은 들리지 않았다.

마을에서 제법 한다는 집안은 매파에게 거금을 쥐어주며 자신의 아들이 방씨네 데릴사위가 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하였다. 청년의 어머니와 아버지 이정은 셋째 아들이 혼기가 찼음에도 장가들 생각은 않고 공부에만 매달려 가슴을 태웠다.

“아버지, 어머니 소자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장가드는 일은 나중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 진 다음에 장가들어도 충분합니다.”
청년의 부모는 아들의 뜻이 확고하자 더 이상 혼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청년의 외조부 변수림卞守琳 공은 딸인 청년의 어머니에게 청년을 방진의 사위로 들이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일 년이 흘러도 이렇다 할 사윗감을 구하지 못한 방진은 속이 타들어 갔다.

‘그 거참, 내 여식이 그만하면 양귀비도 울고 갈 정도이고, 나는 아산에서 제일가는 부자이건만 어찌 변변한 사내가 나타나지 않는단 말인가? 이 아산고을에는 내 여식의 배필감이 없다는 말인가? 어떤 녀석이든 내 딸의 배필감으로 낙점되면 호의호식하며 평생 편안하게 살 텐데. 나 죽으면 그 많은 재산은 모두 사위 몫이 될 것이고 우리 두 늙은이는 죽어서 외손봉사나 받으면 될 것인데. 아산에 인재가 없다면 어쩐다?’
방진은 초저녁부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얘야, 너 혹시 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가 있느냐? 있다면 이 애비한테 말해보렴. 그동안 아산을 이 잡듯 뒤져보아도 그럴듯한 사윗감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니면 이 애비가 조만간 한양에 올라가 사윗감을 알아보려고 한단다. 네 나이로 보아 이미 혼기가 꽉 찼으니 애비가 되어 그냥 있을 수 없구나.”

방진은 불콰한 얼굴로 꽃같이 자란 딸을 바라보았다. 누가 사위가 될지 모르지만 자신의 사위가 될 남자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복을 받는 사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귀하게 자란 딸을 남의 집에 시집보내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방진은 딸의 장래와 자신들의 제사를 책임질 데릴사위를 들이는 일이 훨씬 득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연꽃아씨는 매일은 아니지만 종종 깊은 밤에 정화수를 떠놓고 지성을 드리고 있었다. 연꽃 아씨는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지난해 설날 마을 공터에서 마을 청년들이 모여 윷놀이를 할 때 우연히 마주친 헌헌장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선랑仙郞은 백암에 살며 얼마 전 한양에서 내려오신 분이라고 하셨어. 변씨 가문의 외손자라고 하셨지. 하얀 피부, 훤칠한 키, 늠름한 기상, 침착해 보이는 성품. 요즘은 근동의 소년들을 모아놓고 서당을 열고 있다고 하셨어.

천지신명께 그분과 연분이 닿게 해달라고 지성을 드렸지만 무의미하게 세월만 지나가고 있어. 행여나 그분에게 어떤 인연이 생길까봐 지난 일 년 동안 노심초사하며 지냈어. 이제는 내가 상사병이라도 날 것 같아. 아버님에게 말씀드릴까. 아니야, 괜히 말씀드렸다가 나를 부정하다고 생각하실 지도 몰라. 아아, 어쩌나......’

연꽃 아씨는 입이 타들어가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면서 얼굴이 그만 빨갛게 물들었다. 연꽃아씨는 아버지 방진에게 지금 당장 백암에 사는 청년을 지목하여 신랑감으로 들이라고 간청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사랑채에서 나온 후에도 연꽃아씨는 화끈거리는 뺨을 물수건으로 식혀야 했다. 아버지 앞에서 당당하게 백암고을 그 사내를 말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팠다. 연꽃아씨는 몸종 아지를 불러 저녁에 외출할 차비를 하라고 했다. 연꽃아씨는 어머니 홍씨에게 건넛마을에 사는 친한 벗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금방 해가 넘어가 어스름한 상태라 마을 사람들 시선을 피해 외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지는 신이 나서 앞서가며 재잘거렸다. 연꽃아씨는 청년이 훈장으로 있는 서당을 가보고 싶었다. 지난해 설날 얼핏 한번 본 청년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일 년이 넘도록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며 넋을 놓고 있다가 그 청년을 다른 가문의 규수에게 빼앗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방에 눈이 있어 연꽃 아씨가 서당에 간다하여도 운이 좋아 멀리서 청년의 모습을 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마음만 더욱 심란할 것 같았다.

“아씨, 백암에 누가 있어요? 아씨 친구는 다른 데 살잖아요. 그 마을에는 일가친척분도 안 계시는 걸로 아는데......”
아지는 연꽃 아씨의 눈치를 살폈다.

“아지야, 너만 알고 있어야해.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백암에 말이다. 백암에 임이 계시 단다.”
연꽃 아씨는 나직이 속삭이며 행여 누가 들었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지난해 청년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연꽃아씨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잠깐 주고받은 시선이지만 청년의 강렬한 인상에 연꽃아씨는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변하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머릿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그 누구에게도 첫눈에 그런 야릇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는 연꽃아씨였다. 집으로 돌아온 연꽃아씨는 한지에 청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깊은 밤이 되면 거의 매일 연꽃아씨는 그림을 펼쳐 놓고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다. 어떤 날은 정체불명의 사내가 연꽃아씨의 꿈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아지가 등에 불을 붙이고 앞장서서 걷는데 어쩌다 같은 마을에 사는 총각이나 여인네들을 만나면 모르는 척 하고 휙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은 한참 동안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웬만해서는 연꽃아씨가 밤에 바깥출입을 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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