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꿈속의 임을 만나다

백암으로 가는 들길은 협소하여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었다. 찬바람이 솔솔 부는 텅 빈 들녘에 허수아비가 두 소녀를 보고 양팔을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아지는 춤추는 허수아비를 가리키며 연꽃아씨에게 보라고 했다. 밀짚모자를 쓴 채 다 낡은 하얀 저고리를 입은 허수아비의 모습이 너무 추워보였다.

풀잎에 맺힌 차가운 이슬에 두 소녀의 발과 치맛자락이 촉촉이 젖고 말았다. 동녘 하늘에 막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우측면은 누에가 갉아먹은 것처럼 이지러져 있었지만 은은한 달빛은 두 소녀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서당에는 추수가 끝난 무렵이라 근동의 청소년들이 꽤 모여들어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마을 소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농촌의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초가집의 서당은 대략 이십 평쯤 되어 보이는데 어른 키 높이에 창문이 세 개가 있어 창문이 열려있을 때는 밖에서도 서당 안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달이 떠 있어서 어둑어둑한 서당 주변의 모습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연꽃아씨와 아지는 혹시 누가 볼까봐 버드나무 뒤에서 서당을 살펴보았다. 마침 공부하는 시각이라 서당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지는 등을 끄고 서당에 가까이 접근하였다. 아지가 손짓을 하자 연꽃아씨는 살금살금 서당을 향해 다가갔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연꽃아씨와 아지를 봤다면 큰 사단이 나고 말 것이다. 남정네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서당에 여자의 발길이 이어져 부정을 탄다거나 불길한 징조가 있다거나 하는 별의별 이상한 말이 오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지는 혹시 마을사람들이 오가는지 망을 보고 연꽃아씨는 숨을 죽이며 서당으로 접근하여 창문을 통해 겨우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마을소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 사람은 연꽃아씨가 꿈에도 그리던 그 청년이 아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연꽃아씨는 얼른 버드나무 아래도 돌아와 훌쩍거렸다. 소년들을 가르치던 사람은 청년의 큰형 희신이었다.

대개 초저녁에는 청년의 장형이 기초적인 학습을 시키고 늦은 시각에는 청년이 논어와 맹자를 가르쳤다. 연꽃아씨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그냥 뱀골로 돌아가려 하였다. 아지가 간신히 눈물을 훔치며 새침하게 서있는 연꽃아씨를 달래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두 식경이 지나자 서당 안에서 마을 청소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기초학습 과목에 이어 중급 학습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볼 일을 다 본 학동들이 다시 서당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자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번에도 역시 아지가 먼저 서당에 살며시 다가가 안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아지가 연꽃아씨에게 달려오다 넘어지면서 빈 논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연꽃아씨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아지가 논에서 나오기를 바랐다.

“아씨, 그분, 그분이 틀림없어요. 분명히 아씨가 말씀하시던 그 분이에요.” 진흙으로 범벅이 된 아지는 숨을 헐떡거리며 게거품을 물었다. 순간 연꽃아씨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서당을 향해 다가갔다. 희미한 촛불에 비친 훈장의 모습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아, 선랑님, 선랑님......”
연꽃 아씨는 자신도 모르게 청년을 부르고 있었다. 그때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오더니 연꽃아씨의 고운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감격해 하는 연꽃아씨의 수줍은 두 뺨 위로 수정보다 맑은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자, 원길原吉, 한 잔 하시게나. 이게 얼마만 인가? 그동안 너무 격조했으이. 오늘밤 내 자네하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한번 마셔볼 참이네. 이년들 술값하고 행하채는 내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마시세.”

춘삼월 아산의 갑부인 방진은 한양 다동茶洞에서 내로라하는 주루에서 동문수학이며, 세상에서 속내를 터놓고 이야길 할 수 있는 단 하나 밖에 없는 벗인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영의정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을 만났다.

조선 조정의 최고 실권자인 이준경은 침착하고 빈틈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할아버지는 성종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던 이세좌李世佐라는 사람으로 이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며 한 세월을 주름잡던 인물이었다.

연산군이 지존이 되고 친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며 벌어진 갑자사화 때 이세좌는 삼족이 멸하는 비극을 당했는데 그 와중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후일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었다.

“하하하하……. 자네가 아산에서 달려와 나에게 술을 사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는 게로 구만. 자네는 내 손님이니 오늘 이 자리는 당연히 내가 알아서해야지. 자네 일가붙이 벼슬 청탁만 빼고 내 뭐든지 들어줌세.”
영의정 이준경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옆에 앉은 기생 허벅지를 주물렀다.

“허허허허……. 내가 명색이 아산에 토호이며, 보성군수까지 지낸 처지로 아무려면 조정의 녹을 먹는 자네 술을 얻어먹겠나?”
방진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준경의 비위를 맞추었다. 함께 동문수학한 처지이지만 이준경은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선 조정을 대표하는 영의정의 신분이었다.

그런 영의정에게 아산의 토호 방진이 찾아 온 것이다. 두 사내는 금준미주에 산해진미와 한양 제일가는 기루에서 아리따운 해어화解語花를 옆에 끼고 회포를 풀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두 사람이지만 두 사람은 오랜 세월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방진은 벗에게 마음의 선물을 했고 답례로 이준경은 아산에 직접 내려와 방진의 집에서 수일씩 기거하며 자신이 방진의 벗이고 한양에 든든한 배후가 있는 아산의 실세임을 은연중에 자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방진이 비록 전라도 보성지방 군수를 역임했고 아산에 거주하고 있지만 그는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활의 명인이었다. 조정에서도 방진의 활솜씨는 알아주는 터라 조선 최고 명궁名弓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고, 그의 휘하에는 장차 무과를 앞둔 한양의 이름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대거 문하생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이미 그의 문하에서 무과에 시험에 합격한 자들이 꽤 있었다. 두 사람은 잔을 맞대고 통음하며,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즐거워하였다. 술이 어느 정도 거나해지자 기생이 가야금을 탄주하였다. 두 사내는 노랫가락에 맞춰 어깨를 들썩거렸다.

“원길, 실은 내 부탁이 하나 있어 왔네.”
기생이 노래를 멈추고 술을 따르자 방진이 먼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누가 들을까 방진은 기생들 눈치까지 보았다.

“허허허허......, 아무렴 자네가 괜히 한양에 왔겠나? 무엇이든 말해보세나. 내 자네 청을 한번 들어보지.”
이준경은 잔을 비우더니 빙그레 웃었다.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내 후사가 없지 않나. 아니지 딸 하나 있긴 한데 아무래도 우리 부부 노후와 사후가 불안하이. 그래서…….”
자존심 강한 방진의 눈빛이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었다.

“자네 나이가 그리되었는가? 하긴 가만 보니 우리가 벌써 그리되었네 그려. 자네, 사윗감을 고르고 있나보이?”
이준경의 미간이 좁아지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 그 동안 아산고을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자제들을 알아보았지만 내 딸을 맡길 만한 인물을 발견하지 못했네. 자네가 괜찮은 가문의 자제를 소개해 주시게. 잘만 되면 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네. 딸 아이 나이가 열아홉일세.”   방진은 다급해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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