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청년 이순신

“그래, 그 청년이 그리 총명해 보이던가? 그러나 나는 현재 자네처럼 왕후장상은 아니지만 한양에서 덕망 있고 내로라하는 가문의 자제를 원하고 있네. 자네가 말하는 그 순신이라는 청년의 아비가 지금 내가 사는 이곳 뱀골에서 멀지않은 백암리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네.

몇 해 전 우연히 아산 현감이 초빙한 잔치에서 우연히 그 청년의 아비를 한번 본적이 있었네. 예전에는 아무리 잘나가는 집안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다 기울어가는 가문인데 뭐 볼게 있겠는가? 그 청년 말고 내 딸과 우리 부부의 후사를 맞길 괜찮은 가문의 자제를 추천해 주시게.”

방진은 이준경이 추천한 청년 이순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적어도 조정에서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하는 가문의 자제를 원하고 있었다. 덜 익은 감씹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방진을 보자 이준경은 무슨 말로 벗을 설득할까 고민하였다.

“이보시게 방진이, 자네 방금 전에 나하고 약조하지 않았는가? 내가 추천하는 자네 사윗감에 대해 아무런 토를 달지 않겠다고 말이야.

지금은 그 이순신이라는 청년의 가문이 약간 어려운 처지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에게 크게 실망했으이. 나는 자네가 내 동문수학한 벗이기 이전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속의 욕망 보다 미래의 이상을 볼 줄 아는 큰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보이.”

도리어 이준경이 방진의 사람 됨됨이를 탓하자 방진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몰랐다.

“이보시게 원길, 난, 난 자네가 적어도 조정에 출사하는 고관의 자제를 추천해 줄 줄 알았네. 나 역시 자네에게 실망이 크이. 나는 외손봉사를 받아야 할 입장이라네. 적어도 당상관 이상 가문과 인연을 맺고 싶었네. 그런데 몰락해가는 잔반殘班인 이정의 자식이라니. 참으로 내 한양에 헛걸음을 했으이.”
방진은 이준경에게 더 이상 사윗감을 추천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술만 마셔댔다.

“집사는 백암고을에 사는 이정과 아들 이순신이라는 자에 대하여 소상하게 알아보고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 그 청년의 현재 하는 일과 사람 됨됨이 주변 사람들 평판까지도 세밀하게 알아보고 그의 형제들과 그 어머니도 알아보도록 해”

한양에 가서 이준경에게 사윗감을 추천받으러 갔다가 크게 실망한 방진은 도대체 이순신이라는 청년이 어떤 인물이기에 영의정 이준경이 그리 침이 마르도록 천거하는지 몹시 궁금해 했다.

방진은 집사에게 이순신을 알아보라는 명을 하고도 모자라 자신이 직접 근동을 돌며 청년 이순신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였다. 마침 딸이 사랑채로 아버지 방진의 내의와 버선을 가지고 들어왔다.

방진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딸의 정숙한 자태와 기품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 이슬을 흠뻑 맞은 한 떨기 도화桃花 처럼 고운 자태의 딸에게 빨리 짝을 찾아주어야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애야, 마침 잘 왔구나. 거기 좀 앉아라.”
“아버님, 소녀에게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연꽃아씨의 반짝이는 두 눈에서 금방이라도 수정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애야, 혹시 백암 고을에 산다는 이순신이라는 청년을 아느냐?”
방진은 꿈에도 자신의 딸이 백암 고을에 사는 이순신이라는 청년을 알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넌지시 물었다.

“네에, 약간은......”
연꽃아씨는 도둑질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두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버지 방진이 이미 자신이 지난해 늦가을에 순신을 찾아갔던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조바심하며,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였다.

연꽃아씨는 순간 아지가 아버지에게 지난해 백암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고해바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연꽃아씨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네가 그, 그 이순신이라는 청년을 안다고? 어떻게 집안에만 있는 네가 백암에 사는 그 청년을 알고 있단 말이냐? 이 아비에게 소상히 말해 보아라. 네가 그 청년을 안다고 해서 아비가 너를 야단치려는 게 아니란다.”
방진은 의외라는 시선으로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딸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아버님, 지난해 설날에 동네에서 젊은 패들이 벌이는 윷놀이가 있었어요. 그때 그 선랑을 먼발치에 한번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소녀의 가슴에......”
연꽃아씨는 가슴을 잡고 간신히 말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때 네가 본 그 청년의 모습이 어떻던? 네가 그 청년을 선랑이라 부르는 것을 보니 헌헌장부가 틀림없는가 보구나. 허허허허......, 네가 집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밖에도 관심이 많았던 게로구나. 괜찮다. 괜찮아. 요즘은 예전보다 많은 여인네들에게 대담하게 정인情人을 직접 고르거나 만나는 일이 많아졌다. 이 아비는 그런 일이 큰 허물은 아니라고 본다.”

방진은 딸이 곤란해 할까봐 빙그레 웃음을 지어가며 안심시켰다. 방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이 없는 딸을 지그시 보면서 영의정 이준경의 말을 떠올렸다.

‘왕후장상의 상을 타고 났다고 했지. 그러나 현재의 그 청년의 아비는 백수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자가 벼슬이라도 하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 청년이 어떻게 생겼기에 이 아이가 마음을 빼앗겼을까. 선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아이가 그 청년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인데......’
방진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연꽃아씨는 이순신에 대하여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당황해 했다.

“아가, 괜찮다. 네가 본대로 이 아비에게 말해보렴. 아비도 지금 네 배필을 구하러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니는 중이란다. 얼마 전에는 네가 알다시피 아비가 한양에도 다녀오지 않았니?

그때 이준경 대감을 만나서 네 배필감을 부탁했더니 이순신이라는 청년을 소개하더구나. 그 청년이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고 하면서 그 청년 자랑에 침을 튀기더구나.”
아버지의 말에 용기를 얻은 연꽃아씨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가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방금 한 말이 하나도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방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사를 노려보았다. 일전에 방진이 한양에서 절친한 벗이며, 영의정인 동고 이준경이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던 청년 이순신과 그의 주변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파악해 보라고 하명한 적이 있었다.

“대감마님, 소인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여쭙겠습니까?”
집사는 몇 번이고 방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 이순신이라는 청년이 그리 걸출한 인물인 줄 몰랐구나. 그래, 수고하였다. 추후로도 그 청년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을 접하거든 즉시 나에게 고하거라.”

방진은 집사의 말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한양에서 몰락한 양반이 어쩔 수 없이 처가가 있는 아산에 내려와 사는 별 볼일 없는 가문으로 치부했던 자신의 불찰이 하마터면 큰 실수로 이어질 뻔 했다는 생각에 이르자 방진은 이준경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준경이 조선의 일인지하만인지상다운 안목을 가지고 있구나. 조선 팔도에 많고 많은 가문의 자제 중에 하필이면 가까이 살고 있는 그 청년이란 말인가? 그 청년이 한양에서 태어나 아산으로 내려온 것은 아마도 우리 딸아이와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렇게 준수하고 문무에 뛰어난 청년이 가까이 사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니 과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맞는구나.

그렇다면 서둘러 다른 가문에서 그 청년을 사윗감으로 점찍기 전에 혼사를 공식적으로 진행해야 겠어. 그러나 그 청년의 부친 이정이라는 사람과 겨우 일면식이 있을 뿐인데 내가 불쑥 찾아가 사돈 맺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매파를 보내 그 집 의사를 타진해 보자니 낯간지러운 일이니 이 일을 어쩐다?’
방진은 연신 곰방대를 재떨이에 두드렸다. 방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해보는 거야. 이순신을 나에게 적극 추천한 영의정 이준경을 앞세워 중매를 서도록 해보는 거야. 그러면 틀림없이 성사될 수 있겠지. 흐흐흐흐…….’
방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방진은 즉시 초대장을 써서 집사에게 주고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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