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데릴사위가 되다

“아이고, 동고 이 사람아, 미리 연통이나 놓지 않고서? 이리 그림자처럼 내 집에 들어오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하 하하하......”
남자하인 한 사람만 대동한 채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에 걸터앉을 무렵 뱀골 방진의 집에 도착한 영의정 이준경을 보고 방진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그간 격조했으이. 잘 지내셨는가?”
“잘이 뭔가. 내 일전에 한양 다녀와서 늘 마음이 편치 못했네. 내 몰골을 보시게나. 몇 날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네. 못 먹고 못 자서 내 몰골이 말이 아닐세. 이 광대뼈 튀어나온 것 좀 보시게."
방진이 광대패 흉내를 내며 엄살을 떨었다. 그 모양이 하도 우스워 하인들이 키득거렸다.

“아니, 천하 태평한 자네가 왜 마음이 편치 못했단 말인가?”
이준경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였다. 방진이 당연히 자신에게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자제를 사윗감으로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가 아산에 거주하는 청년 이순신을 소개한데 서운한 감정을 지우지 못했으리라 짐작했다.

방진은 호들갑을 떨며 부인 홍씨에게 속히 주안상을 보라고 하고 하인들에게는 한양에서 영의정 이준경이 자신의 집에 왔다는 이야기를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비밀은 아무리 집안 단속을 하여도 새어 나가는 법이어서 금방 뱀골과 근동에 영의정 이준경이 방진의 집을 찾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펴지고 말았다. 관아에서 소문을 듣고 현령이 방진의 집으로 달려오기도 하고 아산현에서 방귀 좀 뀌는 자들이 이준경을 만나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이준경은 지방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시찰하기 위하여 지나가는 길에 오랜 벗인 방진 집에 들렀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몇몇 눈치 빠른 벼슬아치들은 이준경이 방진의 집에 온 사실을 알고 방진에게 청탁을 넣어 이준경을 만나보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이준경은 그들에게 자신이 아산에 왔다는 사실을 소문 내지 말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영의정 이준경이 지방의 토호인 방진을 찾았다는 소문은 뱀골뿐만 아니라 근동마을을 들썩거리게 했다.

현령과 아전들은 무슨 일로 영의정이 방진의 집을 찾았는지 몹시 궁금해 하였지만 이유를 알지 못해 전전긍긍하였다. 혹시라도 지방 시찰을 돌다 자신들의 과오가 들통 나 불령이 떨어질까 좌불안석이었다.

방진의 처는 산해진미를 상다리가 내려앉을 정도로 차려서 사랑채로 내왔다. 하인들은 집 밖에서 자신들의 주인인 방진이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영의정의 벗이라는 사실을 몰려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하였다.

“자자, 동고, 우선 내 술이나 먼저 받으시게. 이 누추한 곳 까지 와줘서 정말로 고맙네. 내 집에서 며칠 푹 쉬다가 가세.”
방진이 금잔에 미주美酒를 철철 넘치도록 따랐다.

곧 이어 방진의 여식 연꽃아씨가 사랑채로 들었다. 분홍색 비단 치마와 연두색 저고리에 곱게 단장한 연꽃아씨를 바라보는 이준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야, 영의정 이준경 대감이시다. 인사올리고 술 한 잔 올리거라.”
방진이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여 연꽃아씨를 이준경에 소개하였다. 물론 연꽃아씨가 어릴 때 이준경이 잠시 본적이 있었지만 혼기를 앞둔 연꽃아씨의 절을 받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시골규수가 예뻐야 얼마나 예쁠까?'하고 과소평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오, 과연, 과연 자네는 복이 많은 사람일세. 경국지색의 여식을 두었으니 이 조선 천지에 아들 가진 부모들이 어찌 가만히 있으리. 과연, 과연 달나라에서 하강한 항아가 틀림없으이. 내가 장가 안 간 자식이 있으면 당장 자네에게 청혼을 했을 걸세. 허허, 허허허…….”
이준경은 금잔에 술을 따르는 연꽃아씨를 보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올해 몇인고?”
이준경이 연꽃아씨가 따른 잔을 들며 물었다.
“소녀, 올해로 열아홉입니다.”

연꽃아씨가 부끄러워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기분이 붕 뜬 방진은 연신 이준경에게 술을 권하며 기분이 좋아 히죽거렸다. 연꽃아씨가 물러가자 본격적인 혼사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

“자네와 내가 이정의 집에 찾아가면 무척 놀랄 거야. 그러니 사람을 시켜 이정을 이리 초빙하시는 게 어떻겠나?”
이준경이 묘안을 내놓았다.

“동고, 무슨 명목으로 이정을 내 집에 초대해야 하나?”
방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부터 이정과 터놓고 지내는 사이도 아니어서 무슨 명분을 내세워 이정을 초대할지 난감하였다.

“허허 허허허, 걱정하지 마시게. 내 친필을 써 줄 테니 사람을 시켜 이 밤으로 보내시게. 아마 내 편지를 받는 즉시 바람같이 달려올 걸세.”
이준경이 써준 서신을 들고 집사가 백암으로 달려갔다.

“동고, 그 양반이 오면 내가 뭐라고 해야 하나? 다짜고짜 ‘우리 사돈 맺읍시다’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방진은 이준경에게 좋은 묘책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도 내심 불안하였다. 새 술병이 두세 번 더 사랑채로 들었을 때 집사가 사랑채로 들어왔다.

“뭐라고, 자네가 이 밤에 그 분을 직접 모시고 왔다고? 허허, 큰 결례를 했어. 내일 아침에 뵙고 싶었는데 이 밤에 모시고 오다니.”
방진이 집사를 나무라자 이준경은 빙그레 웃었다.

“내 뭐라고 했나? 내 편지를 받는 즉시 달려올 거라 하지 않았는가? 하하하하.”
“어서, 그분을 이리 모시거라. 어서.”
방진이 부리나케 일어나 이정을 맞을 채비를 하였다. 곧이어 집사의 안내로 이순신의 부친 이정이 방진의 사랑채로 들었다.

“만인지상이신 영의정 대감께서 어인일로 아산에 오셨습니까? 또 이 사람까지 불러주시고 감읍할 따름입니다. 방대감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반쯤 허리를 굽혀 서로 맞절을 하였다.

이준경이 아무리 영의정이라고 하나 이정 또한 대대로 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한 선대를 둔 양반이었다. 이정의 아버지 이백록과는 친분이 있는 터라 이준경도 이정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다하여 이정을 맞이했다. 서로의 인사가 끝나자 잠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사람이 감히 동고 대감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니요? 제가 제갈량도 아니거늘 당치도 않습니다. 낙향하여 세월을 낚는 사람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정은 이준경이 보낸 서신에 삼고초려라는 네 글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무조건 뱀골로 달려오긴 하였지만 그 깊은 뜻을 몰랐다. 이준경이 삼고초려 할 만큼 보고자 하는 사람은 이정의 셋째아들 이순신이었다.

이정은 이준경이 자신을 놀리는 말이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일말의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부친과 이준경 대감이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지체 높은 영의정이 자신에게 벼슬을 주려고 일부러 아산까지 왔을 리는 만무했다.

“여해는 잘 있겠지요?”
여해라는 말에 이정은 눈이 번적 떠졌다.
“대감께서 제 셋째 자식을 어떻게?”

이준경은 청년 이순신이 한양에 있을 때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던 일을 우연히 본 사실을 말하면서 방진의 무남독녀의 배필로 이순신을 점찍어 중매를 서기 위하여 한양에서 내려왔다고 하였다.

“오오, 대감께서 제 자식을 그리 잘 보셨다니 덕수이씨 가문에 큰 영광입니다. 한 나라의 재상께서 중매를 서는 일에 이 사람이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방대감이 좋다면 내 자식과의 혼인은 절대 찬성입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이정은 흐뭇해했다. 방진이라면 아산에서 제일가는 부호이며, 무예도 출중하여 따르는 무리가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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