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월하정인

“감히, 감히 내 청혼을 거절하다니. 그 늙은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먼. 어제는 희색이 만면하여 금방 혼사를 진행시킬 듯 했는데 하루 만에 거절하다니. 허허허허, 그것참. 별일이로구만.

도대체 그 이순신이란 청년이 그렇게 도도하고 예의를 모른단 말인가? 우리 상주방씨 하면 아산 제일가는 부호이며, 내 딸에게 청혼하려는 집안이 즐비하거늘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감히 내 딸을 마다해? 어디 두고 봐라. 너희들은 두고두고 후회할거다.”

방진은 너무 분해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영의정 이준경의 중매를 거절한 청년 이순신을 만나보고 싶었다.

‘아니야, 이건 분명 꿈일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꿈속에서도 수도 없이 뵙던 선랑이었는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분명해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만약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선랑님을 찾아가 만나야 돼. 이대로 누워서 천정만 바라 볼 수 없어. 그러나 선랑님이 나를 만나주지 않으면 어쩌나. 만나주지 않으면. 으흐흐흐 흐흐흐…….’
닷새가 지나도록 연꽃아씨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자리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아침이슬 맞은 한 떨기 백합 같던 연꽃아씨가 이순신에게 청혼을 거절당하자 몸져누웠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내심 청혼이 성사되지 않기를 바랐던 가문에서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이전에도 여러 번 매파를 방진에게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당한 후라서 이번에야 말로 다시 매파를 보내면 금방 혼인이 성사될 것 같았다.

실제로 여러 가문에서 방진의 집에 매파를 보냈지만 욕만 먹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또 사나흘이 야속하게 흘렀다. 연꽃 아씨는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피를 종지에 모은 뒤에 편지를 썼다. 연꽃아씨는 선홍색 피로 쓴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속으로 울었다. 연꽃아씨는 하루가 여삼추였다.

“아지야, 외출할 차비를 하거라.”
“네에? 아씨, 제 정신이세요? 아씨,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들지 못하고 누워만 계시어 잘 걷지도 못하시면서 어디를 가시게요? 땅거미가 내려앉았어요.”
아지는 연꽃아씨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쳐댔다. 연꽃아씨는 정신이 몽롱하여 혼자 힘으로는 열 발자국도 걷지 못할 상태였다.

“집안사람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어서 나를 일으키고 앞장서.”
“아씨, 정말로 외출하시게요?”
연꽃아씨는 아지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옷을 푹 뒤집어쓰고 집을 나온 연꽃아씨는 백암을 향해 천근같은 발걸음을 옮겼다.

들녘을 지날 때마다 개구리들이 목청을 키우며 와글거렸고, 산에는 장끼와 까투리들이 짝짓기를 하는지 이따금 조용한 산촌의 적막을 깼다. 아지는 비틀거리며 걷는 연꽃아씨를 부축하며 걷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얼른 연꽃아씨 앞으로 나서서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아씨, 안되겠어요? 열흘 동안 곡기를 끊고 겨우 물 몇 모금으로 버티셨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지시겠어요. 대감마님이 아시면 이년은 죽은 목숨이네요. 제발, 다시 집으로 돌아가세요. 아씨......”
아지가 아무리 매달려 보았지만 연꽃아씨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걷기만 했다.

‘아아, 선랑님, 소녀를 버리시나요? 단 한 번의 눈 맞춤이었지만 소녀는 선랑님의 시선에 사로잡혀 한해가 넘도록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청혼에 득달같이 달려오실 줄 알았는데 거절하시다니요? 저는 알아요. 선랑님께서 저희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와야 한다는 데에 크게 마음이 상하신거죠?

데릴사위 아니면 어때요? 소녀가 선랑님 댁으로 민며느리로 들어가도 된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풍습과 격식이 뭐가 그리 대단한지요? 저는 선랑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제 마음을 가져가셨는걸요? 오늘밤, 선랑님의 언약을 받아내지 못하면 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연꽃아씨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들길을 걸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니 기쁘지 아니 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 한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군자가 아니겠는가?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을 소년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청년 이순신은 정성을 다해 논어 ‘학이편學而編’을 가르치고 있었다.

낮에는 이순신을 비롯한 사형제들이 들에 나가 이웃들 일손을 덜어주었고 밤이면 무지몽매한 산촌 사람들은 상대로 계몽활동의 일환으로 공부를 가르치며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 잘 살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문자를 모르면 개, 돼지와 같습니다. 개, 돼지는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고 살면서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거나 고기를 주인에게 바칩니다. 여러분이 비록 산촌에 태어나 빈한하게 산다고 하여도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면 반드시 크게 쓰일 기회가 옵니다. 집이 가난하다고, 가진 게 없다고 배우기를 포기한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없습니다.

이 조선이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어 있지만 여러분이 항상 깨어 있으면 권세 많은 양반이나 호랑이가 찾아와도 전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하며 여러분의 눈이 뜨일 때 까지 학습에 매진하겠습니다.”
학동들에게 청년 이순신은 희망의 꿈을 심어주었다.

그 꿈이 당장은 이루기 힘들겠지만 순신의 가르침은 언젠가는 조선의 앞날을 밝게 해줄 새싹들에게 단비와도 같았다. 고을 현령들의 기렴주구가 횡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꾸만 움츠려 들면 들수록 벼슬아치들의 횡포는 더할 것이라는 것을 청년 이순신은 잘 알고 있었다.

“아씨, 저기, 저기 그 선랑님의 서당이 보여요. 불이 환한 것을 보니 지금 마을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계신가 봐요?”
아지가 수선을 떨며 서당을 가리켰다.

‘아, 선랑님, 보고 싶어요. 오늘은 정녕 뵙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연꽃아씨는 곱게 접은 붉은 서신을 아지에게 건넸다.
“아지야, 이 서신을 꼭 선랑님에게 전해야 한다. 절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 알았지?”
아지가 편지를 받아들고 신이 나서 서당을 향해 뛰어갔다.

아지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연꽃아씨는 또 가슴을 졸였다. 만일 순신이 편지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헛걸음한 꼴이 될 뿐만 아니라 부끄러워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아 불안하였다.

아버지 방진과 어머니 홍씨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가문을 망신 시켰다고 크게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연꽃아씨는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선랑님, 제발 소녀를 살려주시어요. 소녀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주세요. 천지신명님, 선랑님이 소녀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제발요.’
마침 반달이 배시시 웃으며 산촌을 환하게 밝혔다.

연꽃아씨는 달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편지를 보고 순신이 나오기를 애가 타도록 빌고 빌었다. 그렇게 얼마를 빌었는지 모르지만 아지가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씨, 아씨, 오세요.”
“뭐라고? 누가?”

“누구긴요? 아씨가 꿈에 그리시던 그 선랑님이시죠.”
아지의 숨이 넘어갈 듯 했다. 아지와 십여 걸음 뒤로 헌헌장부가 뿌옇게 달빛에 젖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아아, 선랑님, 천지신명님, 달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청년 이순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연꽃 아씨 고운 두 뺨에 뜨거운 액체가 흘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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