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요조숙녀

關關雎鳩관관저구 - 관관히 우는 물수리새 /
在河之洲재하지주 - 냇물 가까이 노니네 /
窈窕淑女요조숙녀 - 그윽하게 아름다운 숙녀 /
君子好逑군자호구 - 군자의 좋은 짝이라네.

아지를 뒤따라 온 어둠 속의 사내는 연꽃아씨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연꽃아씨를 잠시 바라보다가 달을 올려다보며 시를 읊었다. 시를 낭송하는 소리가 어찌나 청아하고 맑은 지 연꽃아씨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연꽃아씨는 사내가 더 이상 시를 읊지 않자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구對句를 이었다.

求之不得구지부득 - 아무리 구하여도 얻지 못해 /
寤寐思服오매사복 - 자나 깨나 그대 생각에 /
悠哉悠哉유재유재 - 오호라 통재라 /
輾轉反側전전반측 - 밤마다 잠들지 못하네.

연꽃아씨는 흐느끼듯 대구를 이으면서 목이 메었다. 한 구를 읊고 나면 그 동안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연꽃아씨가 대구를 끝내자 사내는 가까이 다가와 연꽃아씨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였다. 달빛에 젖은 사내의 하얀 얼굴에서 금방이라도 은가루가 눈처럼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이 사람, 이순신라 합니다. 이 밤에 뱀골에서 나를 만나러 오셨다니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제가 청혼을 거절한 일로 열흘 동안 곡기를 끊고 자리에 누워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 위험한 일을 하셨습니까?

그대와 방대감 어른에게 정말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저 아이 편에 보낸 붉은 서신을 보고 그대의 단심丹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열흘 동안 이 사람 역시 그대의 청혼을 거절하고 매일 밤 전전반측하였습니다.”
연꽃아씨는 잠자코 이순신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연꽃아씨가 노란 색 편지지에 피로 쓴 내용은 시경詩經에 첫머리에 등장하는 ‘관저關雎’라는 시였다. 남녀상열지사라고 하여 혹자는 굉장히 외설적이라 하지만 요즘의 사회상을 헤아려 볼 때 그리 큰 흠이 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진홍색 피로 쓴 ‘관저’를 읽어 내리며, 가슴이 뭉클하고 콧날이 시큰거려 금방 눈가가 젖었다. 그간 방진과 연꽃아씨에 대하여 꽁꽁 얼어있던 마음이 어느새 햇볕에 눈 녹듯 녹아버렸다. 오히려 곱게 자란 몸으로 몸종 하나 데리고 자신을 찾아온 연꽃아씨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깊은 연정을 느꼈다.

만약 연꽃아씨가 서신도 없이 밋밋하게 청년 이순신을 만나 사모의 정을 알아 달라며 매달리거나, 눈물이나 질질 짜면서 유치한 구애작전을 펼쳤다면 아무 대꾸도 없이 되돌아갔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연꽃아씨에게 품었던 연정도 순식간에 식어버렸을 것이 뻔했다. 백여 마디의 구구한 사연보다 피로 쓴 16자의 시구가 사나이 이순신의 가슴에서 꺼져가고 있던 사랑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결과를 낳았다.

절묘한 시구와 진실함으로 한순간에 사내의 마음을 빼앗은 연꽃아씨의 묘수妙手는 청년 이순신이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단호하게 거절했던 데릴사위 조건을 받아들이게 했다.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내 아버님과 함께 대감어르신을 찾아뵙겠습니다. 이 사람이 잘못 생각한 듯 합니다. 선녀보다 더 고운 그대에게 마음고생을 시킨 이 사람을 용서하세요.

나의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나와 그대의 고운 인연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또한 두 가문이 합심하면 우리 대대손손에게도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순신은 따뜻한 시선으로 연꽃아씨를 바라보았고 연꽃아씨는 감격에 겨워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억지로 참느라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선랑님, 그게 정말이어요? 내일 아침 꼭 오실 거죠?”

“사내대장부가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할까요? 내일 아침 꼭 아버님을 모시고 가서 방대감 어르신을 찾아뵐 테니 집에 돌아가면 그리 말씀해주세요.” 이순신은 침착하고 당당한 어조로 연꽃아씨를 안심시켰다.

“고맙습니다. 선랑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연꽃아씨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반쯤 흐느끼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였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지가 답답한지 불쑥 나섰다.

“우리 아씨가 지난해 봄부터 거의 하루도 안 거르고 선랑님과 고운 인연을 맺게 해달라고 밤마다 천지신명님에게 지성을 드렸구먼유. 선랑님은 우리아씨 정성을 알아주셔야 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치나 아씨는 느티나무 애래 정화수를 떠놓고 손금이 다 닳도록 빌고 빌었어요. 선랑님 때문에 아마 우리아씨 손금이 모두 지워졌을 거예요. 호호호호…….”
아지가 까르르 웃자 연꽃아씨의 두 뺨이 더욱 달아올랐다.

‘지난봄부터? 그렇다면 지난 해 어느 여름날 밤, 내가 우연히 목격한 연꽃낭자의 지성 드리는 대상이 바로 나였단 말인가? 아아, 이럴 수가? 이미 나와 낭자 가슴에 연정의 씨앗이 꿈틀대고 있었구나. 이런 인연이 다 있다니. 내 그런 낭자를 두고 매정하게 굴었구나.’
이순신 역시 연꽃아씨가 지성을 드리는 대상에게 질투심을 품었던 일에 속으로 부끄러워하였다.

“아가씨, 어서 돌아가요. 대감마님께서 아무런 말도 없이 아씨가 없어진 것을 아시면 크게 걱정하실 거예요.”
아지가 연꽃아씨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지 말대로 어서 가보셔야지요. 밤길에 위험한 일이 많습니다. 내가 뱀골까지 같이 가겠습니다.”
청년 이순신이 뱀골을 향해 앞장섰다.
“아닙니다. 아직 서당이 파하지도 않은 듯 한데요?”
“형님께 늦을지도 모르니 학동들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순신이 앞장서고 연꽃아씨가 바싹 뒤를 따랐다. 아지는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저 멀리 앞장서서 뛰어갔다. 지난해 설날 뱀골에서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이후로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서로를 그리워하였지만 어떻게 마음을 알리 방도가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은 가까이 있게 되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 같았다. 구름 속에 들어갔던 달이 얼굴을 내밀면서 두 사람 머리 위에 백설이 뽀얗게 내려앉았다.

연꽃아씨는 조금 전 백암에 올 때 까지만 해도 가슴을 졸이며 천근만근 발걸음을 이끌고 왔지만 지금 열흘 동안 자리에 누워있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고 발걸음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달빛에 촉촉이 젖은 들길을 걸으면서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인기척을 들은 개구리들은 모르는 척 하며 더욱 큰소리를 노래를 하였고 개똥벌레들이 연꽃아씨 머리 위를 빙빙 돌다가 이순신에게 달려들기도 하였다.

달빛이 하얗게 내려앉은 산에서 갑자기 꿩 두 마리가 울면서 날아올랐다. 깜짝 놀란 연꽃아씨는 얼떨결에 이순신의 팔을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이순신은 모르는 척 하며 천천히 걸었다.

“어찌 시경의 관저라는 시를 혈서로 써서 이 사람에게 보낼 생각을 하셨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이순신이 깼다.

“선랑님께서 만약 저를 만나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오늘 이승의 모든 인연을 끝낼 각오를 했답니다. 아지의 말처럼 지난해 설날 뱀골에서 선랑님을 처음 뵌 뒤로 저는 하루도 선랑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하여도 잠시 바람처럼 스친 선랑님의 얼굴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낼 수 없어 속이 까맣게 타버렸답니다. 그런 저의 일편단심을 이승에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선랑님께 피를 내어 써 보낸 것 입니다. 선랑님, 고맙습니다.”
연꽃아씨가 가던 길을 멈추고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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