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붓을 놓고 칼을 잡다

이런 훌륭한 청년이 곁에 있었는데도 내가 엉뚱한 곳에서 사윗감을 찾고 있었다니 내가 참으로 미련했어. 동고 그 사람이 사람 볼 줄 아는 안목 하나는 탁월해.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잠잘 수 있겠어. 흐흐흐흐…….’
방진과 홍씨 부인도 넋을 빼고 청년 이순신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혼례 날짜가 결정되고 덕담이 오가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어가자 푸짐한 아침상이 들어왔다.

연꽃아씨는 친아버지 방진과 시아버지가 될 이정에게 공손하게 잔을 올렸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연꽃아씨 하얀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방진은 지난 열흘간의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니 울컥 하며 속에서 무언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청년 이순신은 연꽃아씨의 섬섬옥수를 바라보며 어젯밤에 받은 피로 쓴 관저를 속으로 읊었다.

關關雎鳩관관저구 / 在河之洲재하지주
窈窕淑女요조숙녀 / 君子好逑군자호구
求之不得구지부득 / 寤寐思服오매사복
悠哉悠哉유재유재 / 輾轉反側전전반측

“이보시게 사위, 내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동안 자네를 가만히 지켜보니 자네 근골이나 몸놀림이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한 여느 무사 못지않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 문과를 그만두고 무과로 전향하는 게 어떻겠는가?

내 일전에 한양에 갔을 때 벗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네. 지금 명나라와 각을 세우고 있는 여진족들이 장차 중원中原을 통일할 거란 소문이 있어. 여진족이라면 전에 금나라를 세우고 오랫동안 만주일대와 중원 그리고 몽고 일부 까지 지배했던 족속들 아닌가?

조선의 상국인 명나라가 지는 해라면 아직 나라의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여진 부족들이 떠오르는 해라는 거야. 여진 부족도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 등 여럿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데 그 중 건주여진 부족이 가장 강력하여 족장인 애신각라각창안愛新覺羅覺昌安이 머지않아 여진의 모든 부족들을 통일하고 중원뿐만 아니라 조선과 왜나라 그리고 안남安南 까지 모두 복속시킬 거라고 하더군.

조선이 지금처럼 파당을 하여 서로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니 저들이 만약 중원을 통일하고 북방의 패자覇者가 된다면 이 조선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라는 거야.

문약에 빠진 문관 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장검을 들고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게 장부의 도리 아닌가?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지 이백년이 되었네. 지나간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나라를 건국하고 이백년 쯤 흐르면 반드시 커다란 변란이 생기더군. 물론 천년만년 태평성대가 지속된다면야 오죽 좋겠는가?

그 뿐이 아닐세. 왜나라를 다녀온 인사들에 의하면 왜는 지금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라는 쇼군이 정적들을 제압하고 왜나라 전역을 거의 다 통일하고 있다는데, 문제는 그가 왜를 완전히 통일시킨 후에 벌어질 일이네. 그의 편에 서서 혁혁한 공을 세운 다이묘(大名)들에게 줄 영지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통일하고 남은 힘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벌써부터 조정이나 명국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하네.

예전에 동고 대감이나 자네의 무인기질을 잘 아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네는 무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거야. 자네가 유년 시절부터 무예를 즐기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리를 이끄는 뛰어난 자질이 있어 문文 보다 무武를 숭상하면 반드시 크게 쓰일 재목이라고 하더군. 어떤가? 만약 나라가 백척간두 위기에 처했을 때 붓만 잡고서 조국을 침범해 오는 외적을 보고만 있을 텐가?

내가 지도하는 청년들도 예전과 인식이 많이 변해서 꼭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 벼슬을 하는 것 보다 장부답게 준마를 달려 삼천리강산을 주름잡아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네.”
방진은 데릴사위로 맞이한 이순신이 매일 방에 들어 앉아 사서삼경이나 들추며 문약에 빠진 모습을 보이자 가슴이 답답했다.

“장인어른 말씀 잘 알아듣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덕수이씨 가문에서 배출한 인재들은 조선건국 이래 문과에 급제하여 문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저 또한 어려서부터 정진하여 장차 문과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하여 입신양명을 꿈꿔왔습니다. 물론 나라가 있어야 가문이 있고, 개인의 영달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갑작스러운 장인어른 말씀에 저 역시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수십 년간 준비해온 과거를 하루아침에 진로를 바꾼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듯 합니다. 우선 제가 제 자신을 이해시켜야 하고 아버님과 형제자매 그리고 벗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순신은 장인 방진의 권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 장인어른이 서애 유성룡과 같은 말씀을 하시고 있다. 또한 몇 해 전 내가 선거이와 홍연해 등 벗들과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 홀연히 나타나 나에게 계시하던 그 도인과도 같은 이야기를 하시니 장차 이를 어쩐다. 내가 장인어른 말씀대로 문과를 버리고 무과로 전향하여 과거준비를 한다면 아버님과 어머님, 형제들 그리고 주변에서 과연 뭐라고 말을 할까.

무예에 능한 사람을 장인으로 두더니 마음까지 바꾸었다고 손가락질 하거나 욕을 하겠지. 그러나 나의 어릴 때부터 꿈은 장군이 아니고 이준경 대감과 같이 모든 조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의정부 수장이자 만인지상인 영의정 아닌가?’

이순신은 장인 방진의 간곡한 권유를 듣고 몇날 며칠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낭군이 끼니도 거른 채 방에 들어 앉아 두문불출하는 모습에 연꽃아씨는 애가 탔다.

“서방님, 불안해요. 장터를 나가거나 먼데서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머지않아 조선이 불바다가 될 수 있다고 해요. 왜나라 아니면 북방 여진 오랑캐들이 조선을 집어 삼킬 거라고 해요. 그리되면 곧 태어날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해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걷는 느낌 이예요. 얼마 전, 아버님께서 서방님에게 무과로 전향하라고 권유하셨잖아요? 여인네 좁은 소견으로 보아도 아버님 말씀이 옳은 것도 같아요. 저 역시 서방님이 장차 태어날 우리 아이들과 덕수이씨와 상주방씨의 명예를 위하여 무과로 전향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 옛날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 잘 아시잖아요. 물론 서방님은 바보온달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요. 그 두 분은 고구려가 외적의 침입을 받을 때 앞장서서 조국을 구하여 유방백세流芳百世하는 아름다운 전설을 남겼잖아요. 한 나라가 세워지고 망하는 것 역시 칼과 창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봐요.

아버님은 전라도 보성군수를 역임하셨지만 서방님도 아시다 시피 무인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세요. 아버님 말씀에 마음이 상하셨다면 깊이 혜량하세요. 나라와 두 가문의 앞날을 생각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거예요.

저는 서방님이 문약에 빠진 허약한 벼슬아치보다 관우처럼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휘두르면서 북으로 오랑캐를 제압하고 남으로 왜놈들을 숨죽이게 하는 조선 제일의 명장名將이 되는 게 소원입니다.

서방님, 저의 청을 뿌리치지 마세요. 제가 딸을 낳으면 왕후로 키울 것이며, 사내라면 조조나 유비같이 일세를 풍미하는 대장부로 키우고 싶어요. 그러나 그 모든 기적은 자신을 바르게 비출 수 있는 맑은 거울이 있듯이 우리 아이들의 거울은 서방님이세요.

서방님이 웃전에 아부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들과 교류하며 잘난 양반행세나 하며, 일신의 부귀영화만을 쫓는 보잘 것 없는 벼슬아치로 사는 것이 저는 싫습니다. 아버님이 서방님에게 무과를 권하신 것도 당신께서 이미 많은 생각을 하시고 당신과 친분이 깊은 한양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신 후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 거예요.

결코 아버님의 생각만은 아닐 겁니다. 아버님이 평생 무인의 길을 걸어오셨기 때문에 서방님에게 같은 길을 가시라고 하는 뜻에서 하신 말씀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서방님, 저는 금방이라도 서방님께서 벼락출세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인고의 세월 동안 묵묵히 힘을 기르시다가 나라가 부르거나 서방님이 필요하신 곳에 가시어 정의의 깃발을 휘날리며 뜻을 펼치면 여한이 없을 거예요. 요즘 저는 이상한 꿈을 꾸고 있어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셀 수도 없이 많은 새카만 쥐들이 몰려와 조선의 남녘바다를 뒤덮으며 바닷물을 모두 마시고 조선의 강토를 갉아먹는데 차마 그 처참한 광경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자다가 놀라 몇 번을 일어나기도 했답니다. 두렵습니다.

그 쥐떼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서방님이 쫓아주세요. 너무 불길하여 서방님께 말씀드리지 못했답니다. 또 언제는 시커먼 호마胡馬 떼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금수강산을 짓밟는 무서운 꿈을 꾼 적도 있었어요. 어째서 임신한 이후로 제가 그 같은 흉몽을 자꾸 꾸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서방님은 저 뿐만 아니라 장차 태어날 우리 아이들 그리고 상주방씨, 덕수이씨 더 나아가 강산의 모든 백성 모두를 보듬어 안아주시고 보살펴 주셔야 해요. 그리하시려면 붓도 좋지만 금강역사 같은 힘과 담력이 있어야 할 거예요.

저는 훗날 태어날 우리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서방님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에게 세세손손 서방님의 아르다운 이름을 잇게 하고 싶습니다. 서방님, 부디, 부디 심사숙고 하시어 아버님과 저에게 미소 지을 수 있게 해주세요.”
연꽃아씨는 낭군에게 지어미로서 또 친정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하는 딸로서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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