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율곡 이이를 만나다

‘아니야. 안 돼. 누가 뭐라고 하여도 내 뜻을 바꿀 수 없어. 내가 뜻을 바꾸면 덕수이씨 문중에서 내가 방씨네 데릴사위가 되더니 성까지 바꿨다고 비아냥댈 거야. 비아냥대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내 꿈이 문과에 응시해 장원급제를 하는 거 였어. 절대 안 돼. 절대로……. 그렇지만 나를 믿고 의지하는 아내와 방씨 가문의 사람들 뜻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어찌하나?’

청년 이순신은 또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한양으로 올라와 벗들을 만났다. 으레 그랬던 것처럼 운종가雲從街 피아골에서 유성룡, 서철徐徹, 선거이, 홍연해를 만나 회포를 풀기로 했다. 청년 이순신은 방씨가문의 데릴사위가 되고 거의 일 년이 넘도록 한양의 벗들을 만나지 못했다.

“여해, 남모래 도둑 장가들더니 사람이 변했으이. 벗들을 나 몰라라 하니 말이야. 하하하하......”
선거이가 주점에 들더니 이순신을 얼싸안고 반가워하였다. 뒤이어 홍연해가 주점에 들어서더니 두 팔을 번쩍 들어 이순신을 오락 끌어안았다.

“여해, 반갑네. 늦었지만 축하 하네. 지난해 여름 자네 혼인식 때 가보지 못했네. 그때 영의정 이준경 대감을 비롯하여 한양에서 제법 방귀깨나 뀌는 자들이 대거 아산으로 몰려갔다고 들었네. 한양의 대갓집 자제 혼례식에도 그렇게 많은 고관들이 몰리는 일은 드물걸 세. 참으로 부러우이.”
홍연해는 정말로 섭섭한 표정까지 지으며 웃었다.

“미안하이. 내 미처 겨를이 없었네. 아산에서 혼례를 치르다 보니 자네들을 아산까지 내려오라고 하기가 뭐해 내 알리지 않았네. 정말로 미안하게 되었네. 대신 오늘 술값은 내가 치름세.”
이순신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탁주가 한 주전자 비워갈 무렵 서애 유성룡이 귀공자풍의 한 사내와 주점에 나타났다.

“이 사람, 여해, 왔구먼. 내 그동안 자네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시는가? 하하 하하하......”
유성룡이 이순신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미안하이. 이견而見, 자네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는 소식은 들었네. 정말로 축하하이”
이순신이 유성룡과 인사를 마치자 뒤에 서있던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이런, 내 정신을 봤나. 이보시게 여해, 인사하시게. 태조 이성계께서 조선을 건국한 이래 과거에 아홉 번 응시하여 아홉 번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리는 예조좌랑 율곡 이이님을 내가 일부러 모시고 왔네.”
유성룡의 말에 그제야 이순신은 이이를 자세히 보았다.

“율곡 이이라 합니다. 여해 공은 이 사람과 같은 덕수이가가 아닙니까? 항렬로 보면 공께서 이 사람보다 위에 계십니다.”
조정에서 정6품의 벼슬을 하는 이이는 조용하면서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순신은 오래 전에 문중 행사 때 이이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이순신 보다 여덟 살 위인 율곡 이이는 나이가 어린 이순신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다해 이순신을 대하였다.

“너무 오래 전에 뵙고 다시 뵙다보니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순신 역시 이이와 비록 같은 덕수이씨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조정에 출사하는 율곡 이이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순신과 이이는 같은 시조를 두었다. 덕수이씨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벼슬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인데 그의 손자로 충렬왕 때 통정대부 지삼사사知三司事를 역임한 이소李劭의 맏아들 윤운允蒀이 부원군파府院君派 파조派祖가 되고, 둘째아들 윤번允蕃이 정정공파貞靖公派의 파조가 된다. 이순신은 정정공파 계열로 12세손이며, 이이는 부원군파 계열로 13세손이 되니 이순신이 비록 이이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항렬로 위가 되었다.

이순신이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자 서애 유성룡은 예전에 말한 것 처럼 이순신이 당연히 무과에 응시하여 무인의 길을 걷는 게 좋다고 강권하였고, 선거이와 홍연해는 금강산에서 한 도인이 한 말을 상기시키며 함께 무인의 길을 걷자고 강력히 권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벗들의 이야기를 듣기만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자코 탁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좌중의 이야기를 말없이 경청하던 예조좌랑 이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술자리에서 가장 연령이 많고 조정에 출사한 경력도 꽤 되어 그의 이야기는 다른 벗의 이야기 보다 무게가 있어 보였다.

“여해공께서 문과에 응하시던 무과에 응하시던 전적으로 여해공 의중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 역시 여러분들 의견과 동일합니다. 지금 왜나라 기류가 심상치 않으며 중원을 놓고 명나라와 힘겨루기를 하는 건주여진 또한 우리 조선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지금의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지리멸렬되어 정신들이 없습니다. 이럴 때 저들 중 패자가 되어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범한다면 정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조선에서는 십만 이상의 정병을 양성해야 합니다.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이 대부분 문과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역시 문과로 등용되어 조정에 출사하는 몸이라 할 말은 없습니다만,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위로 대륙 오랑캐가 있고 아래로 열도에 왜적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여해공께서 여타 사대부 자제들처럼 문과에 호감을 두시는 것 보다 상무尙武에 전력투구 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우리 덕수이씨 문중에서도 이제는 문관보다 걸출한 절도사나 병마사 또는 통제사 같은 호걸이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사람이 관상을 좀 볼 줄 압니다. 여해공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타고 나신 듯 보입니다. 아무리 까마귀 무리에 섞여 있어도 백로는 금방 눈에 들어오는 법입니다. 여해공은 낭중지추가 분명합니다. 송곳은 주머니에 감출 수 없습니다. 여해공께서 이 사람과 여러 벗님들의 의견을 깊이 새기셨으면 합니다.”
율곡 이이의 달변은 이순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아아, 어쩌나. 장인어른과 아내뿐만 아니라 벗들조차도 내가 무인의 길을 걷기를 권하니 그들 의사를 무시할 수도 없고. 뿐만 아니라 북에서 여진족이 흥기하고 있으며 왜에서도 오다노부나가라는 쇼군이 전국을 통일하여 그 세를 몰아 조선을 침략한다면 조선은 꼼짝없이 금수강산이 피바다가 될 터인데.

주변의 권유를뿌리치고 나 혼자만 문과를 고집하다가 훗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테고, 지금의 우리가문의 여러 가지 상태로 보아 내가 무과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하는 편이 좋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꿈꿔왔던 뜻을 꺾어야 하다니 마음이 아프다.

그래, 좋다. 내가 유년시절 병정놀이를 즐겼고, 장인어른이나 금강산에서 만난 도인 말씀대로 내가 무골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법, 무너진 가세를 키우고 가문을 빛내는 방법이 어쩌면 문방의 길을 걷기보다는 무인이 되는 것이 빠를지도 모를 일이지.

덕수이씨 시조이신 이돈수 할아버지께서도 중랑장이란 무관의 벼슬을 하셨으니 우리 덕수이씨 가문은 근본이 무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어. 어쩌면 나는 무인의 길을 걷지 않으면 출세를 못할지도 몰라. 좋아, 아내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자.'
이순신은 마음의 짐을 훌훌 털고 일어났다.

한양에 갔다 열흘 만에 아산에 돌아온 이순신은 곧 바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를 만나서 그동안 심사숙고하고 고민하던 속내를 털어 놓았다. 처음에는 아들이 문과를 포기하고 무과를 위하여 무예를 연마하겠다고 하자 이순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크게 놀라는 안색이었다.

곰방대를 연신 빨아대던 아버지 이정은 한참 동안 앞마당에 나가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사랑채로 들었다. 어머니 변씨 역시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다 아들의 얼굴을 보고 아무 말 없이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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