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영원한 무인의 길을 걷다

“네 나이가 벌써 스물 둘이다.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지금까지 준비해온 문과 공부를 포기하고 정녕 무과에 응시하겠다면 그렇게 해라. 네가 서너 살 때, 한 스님이 탁발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네가 툇마루에서 잠든 모습을 보고 그러더구나. ‘저 아이는 장차 큰 칼로 산하를 편안케 할 인물이니 훗날 아이가 자라거든 저 아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뜻을 존중해 주고 뒷받침만 잘하라’고 말이다.

그래라. 네가 무인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리하여라. 이 아비는 문文이든 무武든 나라의 기둥이 되고 우리 덕수이씨 가문을 빛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아들 이순신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힘찬 어조로 힘을 실어 주었다.

어머니 변씨는 아들의 뜻을 반대할 줄 알았던 남편의 의외의 말에 안도하는 눈치였다. 뱀골로 돌아온 이순신은 부인에게 그간의 고민과 결심을 이야기 하였다.

“서방님, 감축 드립니다. 정말로 잘 생각하셨어요. 오늘의 결정은 결코 후회가 없을 거예요. 정말로 고마워요.”
연꽃아씨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가슴이 울렁거리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 모든 게 부인을 위해서요. 부인의 간곡한 청이 없었더라면 나는 문과에서 절대로 무과로 전향하지 않았을 거요. 앞으로 우리 부부에게 예상치 못한 혹독한 시련이 일어나더라도 절대로 믿음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한 그 어느 사악한 기운도 우리의 연분을 해치지 못할 거요. 부인 고맙소.”
이순신은 감격에 겨워 가늘게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아내를 살며시 감싸 안아주었다.

“그래, 정말로 잘 생각하였네. 어쩌면, 자네 양 어깨에 조선의 운명이 걸렸을지도 모르겠어. 참으로 잘 생각하였어. 내일부터 당장 집 앞 넓은 야산에 활터를 만들고 마장馬場을 세워 자네가 무예연마에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내 손수 발 벗고 나서야 겠네.

그리고 검법에 능한 내 동무를 초빙하여 내 집에서 먹이고 재울 계획이네. 자네는 오로지 병법 공부와 무예 연마에 혼신의 힘을 쏟도록 하시게. 정말로 고맙네. 고마워.”
방진 역시 사위 이순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 어찌하나 걱정하면서 자신과 딸 그리고 상주방씨 가문의 앞날을 그려보고 있었다.

사위 이순신이 무과로 전향하자 방진은 자연스럽게 무예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무과시험은 보통 식년 문과와 같이 초시, 복시, 전시 3단계의 시험이 있는데 초시는 전년도 가을에 치르고, 복시와 전시는 식년 봄에 시행하였다. 초시에는 향시, 원시院試가 있는데 향시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하였다.

각 도마다 선발인원 숫자가 정해지는데 훈련원 70인, 경상 30인, 충청·전라 각 25인, 강원·황해·평안·함경 각 10인 등 모두 190명을 선발했다. 병조에서 식년 봄에 초시 입격자를 한양으로 불러 병조와 훈련원이 주관하는 강서와 무예를 시험을 보게 하여 총 28명을 선발했다.

이때 전시에서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의 등급을 정했다. 무과의 고시과목 중 강서는 복시에만 있었는데, 4서5경 가운데 택일하고, 무경7서에서 택일하였으며, 통감, 병요, 장감將鑑, 박의博議, 장감將鑑, 무경, 소학 중에서 택일하도록 하였다.

아울러서 경국대전과 함께 고강하도록 했다. 무예에는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 기창旗槍, 격구 등 6기六技가 있다. 식년무과 이외에 비정규적으로 실시하는 증광시, 별시, 알성시, 정시庭試, 관재시觀才試 등이 있다. 방진과 사위 이순신은 일심으로 무과를 향한 부단한 노력을 이어갔다.

“아버님, 서방님, 잠시 목 좀 추기시고 하세요.”
아늑한 방화산芳華山 기슭 아래 설치된 이순신을 위한 치마장馳馬場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순신은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며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장인 방진은 역시 말을 타고 사위와 함께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백발백중이었다.

두 사람이 말을 달릴 때마다 뽀얀 먼지가 일었다. 연꽃아씨는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홍씨와 같이 냉수를 가지고 와서 연습 장면을 지켜보았다. 산달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햇볕에 까맣게 탄 채 구슬땀을 흘리는 낭군이 안쓰러운지 연꽃아씨는 연신 이순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대로만 꾸준히 연습하면 머지않아 기마 자세는 틀이 잡힐 걸세. 서서 쏘는 활보다 달리는 말 위에서 쏘는 기사가 훨씬 어렵네. 자네 활솜씨는 배운지 얼마 안 되었지만 장차 조선의 명궁名弓 반열에 오를 것이네. 검법과 창술도 어지간히 익혔으니 이제부터 한 단계 격을 높여 매진해야 할 걸세.”
방진은 냉수 그릇을 사위에게 건네며 흡족해 했다.

“모두가 장인어른 덕분입니다. 주경야독하는 각오로 정진하겠습니다.”
“서방님, 안돼요. 그러시다가 병이라도 얻으시면 어쩌시려고요.”
연꽃아씨가 손사래를 치며 곧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토끼눈을 하였다.

“하하하하......, 염려하지 말거라. 이 서방은 무골의 신체를 타고나서 웬만한 고난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단다.”
방진은 딸의 말에 호쾌하게 웃었고 어머니 홍씨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이 서방, 밤낮으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이 아이도 예뻐해 주시게. 곧 산달이 돌아오니 많이 힘들게야. 여인네는 낭군의 작은 관심과 사랑에 울고 웃고 하는 거라네.”
장모 홍씨는 이순신의 까맣게 탄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부부의 정이 우선이라는 점을 은연 중 강조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이순신이 23세 살 되는 해에 연꽃아씨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회薈라 하였다. 장인과 사위의 관계는 마치 피를 나눈 부자지간 같아서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 관계를 몹시 부러워하였다.

한양에서 이순신과 함께 수학하던 벗들이 종종 내려와 이순신의 무예 공부에 대한 열정에 탄복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이순신이 27살 되는 해에 연꽃아씨는 차남을 낳았고 이름을 울蔚이라 하였다. 셋째아들의 둘째 손자까지 본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이듬해 조정에서 부여하는 종6품 무관직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제수 받았다.

조선 선조宣祖 5년 4월 이순신은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28세의 나이로 무과 별시에 응시하였다, 처음 응시한 과거시험을 치르는 중에 낙마하여 그만 왼쪽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러나 연꽃아씨와 장인 방진은 크게 낙심하였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이순신을 위로하며 재기할 수 있도록 따뜻한 말로 용기를 주었다.

“서방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한번 실패는 더 큰 성공을 위한 좋은 경험이라 할 수 있어요. 저와 아버님은 서방님의 이번 과거 시험 실패에 대하여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낙마로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서방님 나이에 비해 늦은 과거응시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옛날 주周나라 강태공께서는 때를 보며 낚시로 세월을 보내다 일흔두 살에 주문왕周文王에게 발탁되어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 천세만세에 그 이름을 청사에 길이 빛내고 있습니다.

서방님 곁에는 제가 있고 우리 아이들이 있습니다. 힘을 내세요. 십년 아니라 백년이 흘러가도 저는 서방님 곁에서 뒷바라지 할 겁니다. 언젠가는 서방님의 이름 석 자가 조선 천지 모든 백성들 입에서 찬양하는 날이 꼭 올 거라 믿어요.”
연꽃아씨는 무과시험에서 낙방하여 상심해 있는 이순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부인, 고맙소. 장인어른과 부인 볼 면목이 없소. 부인 말씀대로 내 다음 과거에서 반드시 급제하리다. 힘들고 괴롭더라도 나를 믿고 응원해주오.”
이순신은 연꽃아씨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순신의 동문수학한 벗들이 거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이순신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세월이 아쉬웠다. 아버지와 형제들 볼 면목이 없어 잠시 아버지 어머니를 찾지 않기로 하고 다시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다.

명종 임금이 붕어하고 중종中宗의 후궁이었던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손자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이 조선의 새로운 지존이 된지 9년째 되는 해 2월에 이순신은 32살의 나이로 식년 무과에 당당히 급제하였다. 처음 치렀던 별과와는 다른 조정에서 3년마다 한 번씩 시행하는 식년무과였다.

무과합격자는 모두 29명이었는데, 이순신은 병과 4등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우수한 성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 대부분이 오래전부터 기마술을 반복 훈련한 현직 병사들이었다.

보인保人 신분으로 사가私家에서 무예를 연마하였던 이순신으로서는 나름 좋은 성적이었다. 장인 방진의 조력과 연꽃아씨의 뒷바라지와 함께 이순신의 부단한 노력이 거둔 결실이었다.

서애 유성룡은 정5품 이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율곡 이이는 사간원의 으뜸인 정3품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순신의 부친 이정도 무관의 벼슬인 종5품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제수되는 등 이순신의 주변은 온통 희소식만 있었다.

방진은 사위 이순신이 과거에 급제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 상주 방씨와 덕수 이씨 그리고 이순신의 외가인 초계 변씨 문중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또한 방진과 친분이 있는 한양과 아산의 벼슬아치들이 대거 뱀골로 몰려들어 상주 방씨와 덕수 이씨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였다.

“부인, 고맙소. 오늘의 이 영광은 오로지 부인의 헌신적인 뒷받침 결과요. 내가 만약 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낱 보잘 것 없는 문관의 길을 걸으며, 파당을 만들고 부귀영화만을 탐하는 모리배가 되었을지도 모르오. 정말 고마워요. 지난 십년 동안 묵묵히 인내해 가며 이 못난 지아비를 뒷바라지 하고 두 아들까지 낳았으니 부인의 공덕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내가 먼 훗날 저승에 들더라고 부인을 은애하리다.”
이순신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기쁨에 들떠있었다.

“이 모든 게 서방님의 피땀 나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저는 별로 한 게 없어요. 이제 조정에 출사하시게 되었으니 머지않아 서방님께서 북벌남정北伐南征하시며 조선을 만세반석에 올려놓으실 거라 믿어요. 서방님, 고마워요.”
삼일동안 이어진 축하 잔치가 끝났다. 이순신은 마치 이슬을 머금고 핀 한 송이 연꽃처럼 고운 연꽃아씨를 꼭 껴안아 주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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