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반도주(夜半逃走)

희뿌연 달빛이 한여름 밤 산길을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는데 숨을 헐떡거리며, 두 여인이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었다. 앞서 걷는 젊은 여인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자주 소매로 훔치면서 이지러지는 달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달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 밤에는 달이 마치 자신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듯 자주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다가 다시 젊은 여인에게 나타나곤 했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인은 종종 걸음으로 젊은 여인 뒤에 바짝 붙어서 걷고 있었지만 나이 차에서 오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쉬어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두 여인은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자주 뒤를 돌아보았지만 자신들을 따라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두 여인은 산 아래 주막에서 저녁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고 계룡산의 험준한 골짜기를 쉬지 않고 걸었다. 앞서 가던 젊은 여인이 뒤를 돌아보며 헉헉거리며 뒤 따라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등짐을 지고 보퉁이를 끌어안고 뒤 따르는 뚱뚱한 여인이 측은해 보였다.

“유모, 저기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가요. 무척 힘들어 보여요.”
“마마, 쇤네는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하고 밤도 꽤 깊은 것 같은데요.”
땀으로 목욕을 한 것처럼 유모라 불리는 여인은 위아래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말은 괜찮다고 하면서도 여인은 메고 있던 짐을 얼른 바위에 내려놓았다.

“유모, 이제는 마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아기씨라고 불러요.”
“공주마마, 어찌 감히 아기씨라는 여염집 호칭을 부를 수 있겠나이까?”
“나는 이제 공주가 아냐. 아버지의 지엄한 어명에 의해 폐서인 된 마당에 공주는 무슨 공주. 괜찮으니 아기씨라 불러요.”
“마마, 어찌…….”
“유모, 난 괜찮으니 그냥 아기씨라고 부르래도요.”
“…….”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달이 살포시 얼굴을 내밀었다. 옷은 비록 여염집 여인들이 입는 치마저고리를 걸쳤어도 젊은 여인의 얼굴은 감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이 서려 있었다. 주변 숲 속에서 소쩍새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잠시 눈을 감고 며칠사이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세희야, 이 밤으로 대궐을 빠져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내일 너는 이승의 사람이 아니야. 이 어미가 네가 어디 먼데 가서 평생 숨어 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금은보화를 마련해 놓았다.”
어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는 당돌하게도 아버지 수양의 패덕을 고한 딸이 안쓰러우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통탄하고 있었다.

‘아, 어미로서 딸의 목숨을 보전해주지 못하니, 내가 어찌 어미라 할 수 있으리오.’
“어머니, 소녀는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님의 눈 밖에 나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녀 이 궁궐에서 죽겠습니다. 그러니 더는 아무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네가, 네가 정녕 이 어미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 제발 부탁이다. 이 어미의 간청대로 오늘 밤 이 궁궐을 벗어나 멀리 계룡산 동학사로 떠나거라. 내 사람을 보내 그곳 주지 스님께 연통을 넣을 터이니, 이 어미 말대로 하거라. 그것만이 너와 내가 이승에서 모녀지간의 연을 이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다. 제발 이 어미의 간청을 들어 주거라.”

 “어머니, 으흐, 흐흐흐흐.”
“언니, 어마마마 말씀대로 하세요. 그것만이 우리 동기간의 정을 이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부디, 어마마마의 청을 물리치지 마세요.”
왕비 윤씨의 곁에 있던 세희공주의 동생 의숙공주는 중전 윤씨를 거들었다. 평소 언니 세희공주의 학식과 미모에 눌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던 동생이었다. 그러나 언니 세희공주가 임금이 된 아버지 수양(首陽)에게 전 왕을 폐위시키고 권좌에 앉은 패덕(悖德)을 고했다가 수양의 노여움을 사서 극한 싱황에 처하자 언니가 한편으로는 측은해 보였다.

“어머니, 소녀 잘못한 것이 없사온데 야반도주를 하라니요? 소녀 궁궐에서 아버님 손에 죽겠습니다.”
“이것아, 너는 이 어미가 죽기를 원하는 것이냐?”
“언니, 어마마마 뜻에 따르세요. 먼 훗날 아버님의 노여움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 그때 입궐하면 되잖아요.”

세희공주는 불같은 성격을 지닌 아버지 수양이 자신을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님, 하늘에는 해가 하나여야 하옵니다. 하지만 조선 하늘에는 해가 둘이옵니다. 아버님은 해가 아니옵니다. 찬위한 금상을 상왕(上王)에게 돌려 주사옵고 아버님 손에 목숨을 잃고 구천을 헤매고 있는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주세요. 그것만이 아바마마께서 천대만대에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최선의 방도입니다. 부디, 소녀의 청을 뿌리치지 마소서.”

수양은 딸의 간언(諫言)을 처음에는 그냥 넘기려 하였으나, 점점 그 도가 지나치자 서서히 노여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희는 들어라. 너는 아비의 일에 대하여 이 시간 이후로는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아녀자는 아녀자의 길을 걸으면 되느니라. 아무리 아비라 하지만 더는 너의 말을 듣고 싶지도 않거니와 이미 토설한 내용도 참기 어려우니 이 아비의 마지막 충고를 깊이 새길지어다.”

수양은 딸 세희공주의 영민함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행적에 대하여 비수를 들이대는 딸이 미웠다.
“아버님, 아직 늦지 않았나이다. 피비린내 나는 왕위를 돌려주시고 그간의 잘못을 참회하소서. 소녀, 죽어도 뜻을 굽히지 않겠나이다.”
“어허, 네가 무얼 안다고 아비를 가르치려 드느냐? 방자한 것 같으니.”
수양은 노발대발하면서 마시던 술잔을 세희공주를 향해 집어 던졌다. 옥으로 된 술잔이 공주의 머리를 맞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사색이 된 내관이 얼른 달려와 깨진 잔 조각을 치웠다. 세희공주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그러나 세희공주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아버지 수양을 똑바로 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세종 할아버님 이후로 태평성대를 구가해온 왕실과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역모를 핑계로 안평숙부를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김종서 대감과 황보인 대감 등 내로라하는 이 나라의 충신들을 척살하셨습니다. 역모를 꾸민 세력은 안평숙부와 충신들이 아니라, 칠삭둥이 한명회와 권람 등 기생충 같은 자들과 아버님이 아니옵니까?”

“뭣, 뭐라고? 네 이년! 아무리 너와 내가 부녀지간이라 하나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느니라. 네 년이 아무리 공주의 신분이라 하나 너 역시 아비의 신하이니라. 여봐라, 이년을 당장 하옥시켜라. 날이 밝는 대로 국문을 열어 죄를 엄중히 물으리라.”

수양은 주안상을 엎어버리고 큰 딸, 세희공주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금방이라도 박살낼 태세였다. 지밀전 상궁들과 내관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중전 윤씨가 왕의 침전 안으로 들었다.
세희공주가 상감의 침전에서 아버지 수양에게 그간의 잘못을 간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왕비 윤씨는 상감의 침전 밖에서 부녀지간의 언성이 오가는 것을 듣고 있었지만 침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상감의 언성이 높아지자 중전은 더 참지 못하고 침전으로 들었다.

“상감, 참으세요. 어린 아이가 무얼 알겠어요. 그냥 상감을 위하는 뜻에서 한 말이니 노여움을 거두세요. 세희는 어서 물러나 중궁전으로 가 있어라.”
수양은 다시 큰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노여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수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눈이 빨갛게 충혈 되면서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중전도 과인에게 따질 일이 있으신 게요?”
“상감, 따질 일이라니요? 세희가 그만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한 말이니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밤이 깊었으니 그만 침수 드시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게 틀림없나 봅니다.”
“상감, 무슨 말씀이세요?”

“어찌 딸년이 아비에게 두 눈 똑바로 뜨고 대들 수 있단 말이오? 어떻게 아이들을 훈육하시었기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 아이를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엄하게 치죄(治罪)해야겠습니다.”

중전 윤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던지 상감의 노여움을 풀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서 난 딸 세희공주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잔병치레가 많던 공주였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서책을 늘 곁에 두고 지내는지라 모르는 것이 없어 할아버지 세종은 손녀인 세희공주를 특히 귀여워했다.

“상감, 아무리 세희가 상감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해도 상감의 딸 아닙니까? 소첩이 별도로 불러 훈육시킬 테니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중전은 누구 편이요?”
“상감, 누구 편이라니요? 지아비와 자식사이에 무슨 편을 들고 말고 할 일이 어디 있답니까?”
“나는 그 아이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상감, 그 아이는 몸도 성치 않고, 성격이 상감을 닮아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이잖아요. 며칠 말미를 주세요. 소첩이 단단히 타일러 상감께 용서를 빌도록 할 테니까요.”
“필요 없어요. 난 딸자식 하나 없는 셈 칠 테니 그리 아세요.”
“상감.”
중전 윤씨도 노여움이 극에 달한 수양을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아아,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더냐?’
중전 윤씨는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지아비 수양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준 야망이 큰 여인이었다. 윤씨는 지아비 수양이 대권을 쥐는데 일조한 여인으로 시아버지 세종임금 밑에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시아주버니인, 붕어한 문종(文宗) 임금은 아우인 수양대군의 야망을 간파하고 수양의 식솔들이 궁궐에 출입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숱한 우여곡절과 피를 뿌린 광풍이 휘몰아 친 뒤 조카를 허울뿐인 상왕(上王)에 앉히고 금상의 자리를 차지한 지아비 수양이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다지만, 중전의 마음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언제 상왕을 지지하는 숨어있는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 자신의 혈육인 세희공주가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천근만근 같은 걸음으로 중궁전으로 돌아 온 중전은 세희공주를 타일러보려고 하였지만 고집불통이었다. 달이 막 모습을 감춘 밤, 경복궁의 동쪽 문이 열렸다. 이미 중전의 밀지를 받은 궁궐 수비대장은 어둠을 틈타 두 여인과 한 남자를 안전하게 궁궐 밖으로 빠져 나가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은 세희공주와 유모, 철릭을 걸친 젊은 무장(武將)등 세 사람이 조용히 대궐문을 나섰다. 한양의 밤거리는 칠흑 같은 어둠에 고요했다. 종종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올 뿐이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재빨리 경복궁을 빠져나와 육조(六曹) 거리를 지나 광통교(光通橋)를 건넜다.

한양의 밤하늘은 낮아서 손을 뻗으면 동서로 길게 흩뿌려져있는 은하수가 잡힐 듯 했다. 세 사람은 말없이 남쪽을 향해 걷기만 했다. 칼을 찬 무장이 앞서서 걷고 공주와 유모가 뒤 따라 걸었다. 대부분의 시전(市廛)들은 문이 굳게 닫혀있고 만취한 주정꾼들이 골목길 아무 곳에서 소피를 보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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