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도망가는 공주(公主)

 자시(子時) 이후에는 통행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지라 백성들의 발걸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종종 긴 창을 든 서너 명의 순라꾼들이 지나가곤 했다. 그때 마다 젊은 무장은 얼른 두 사람을 골목길로 안내하여 몸을 숨기도록 했다.

 세희공주는 아버지 수양이 권좌에 오르기 전 궁밖에 살 때 한양의 번화가를 자주 구경 다니곤 했다. 비록 달이 없는 어두운 밤거리지만 거리가 눈에 익었다. 한 식경을 걷자 숭례문이 어슴푸레 보였다. 무장이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숭례문을 지키던 무장에게 다가가 보여주자 경계를 서던 군관이 군호를 붙이며 깍듯하게 경례를 하였다. 세희공주 일행은 쉬지 않고 남쪽을 향해 걸었다.

앞서 걷던 무장이 공주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땅 바닥만 쳐다보고 걷던 세희공주는 서서히 멀어지는 경복궁 쪽을 돌아보았다. 공주의 양볼은 눈물로 흔건하게 젖어있었다. 공주가 뒤를 돌아보자 등짐을 지고 보퉁이를 끌어안고 걷던 유모가 얼른 수건을 꺼내 공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공주마마, 힘드시면 잠시 쉬어 갈까요?”
“아니야, 유모. 난 괜찮아요. 쉴 곳도 없는 데요.”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쉴만한 장소가 눈에 뛰지 않았다. 새벽이라 모든 민가 뿐만 아니라 관아들의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어쩌다 마주친 주막도 문이 닫혀 있어 세 사람이 마땅히 쉴만한 장소가 없었다.
“공주마마, 날이 밝기 전에 강을 건너셔야 합니다. 중전마마의 지엄한 분부가 계셨습니다. 힘드시더라도 참으셔야 하옵니다. 소인은 공주마마께서 무사히 강을 건너도록 도와 드릴 것입니다.”

젊은 무장은 세희공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중전의 뜻을 전했다. 공주는 생전 이렇게 험한 밤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몸이 허약해 그동안 어머니 중전 윤씨의 지극한 간호를 받고 있었다. 엊저녁에도 상궁이 가져온 보약을 마셨었다. 세희공주는 한기(寒氣)를 느껴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이제 나는 조선국의 공주도 아니고, 이 한양하고는 오늘로 인연을 끊는 거야. 영원히 나는 아버님과 부녀의 인연을 정리하는 거야. 오늘 밤을 마지막으로…….’
“공주마마, 추워 보이세요.”
“유모, 이제 난 공주가 아니야.”
“네에?”
“이제부턴 일개 여염집 아녀자로 살아가야 돼.”
“공주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

세희공주는 대답 대신 한숨만 쉬었다. 멀리 흥인문 쪽으로 별똥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감추었다. 개들 짖는 소리도 잠잠해 졌다. 저녁나절 비가 온 탓으로 움푹 파인 길에는 물이 고여 있어 헛디디면 신발이 모두 빗물에 젖었다.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세희공주는 이를 악물었다.

 ‘아아, 어찌하다가 내 신세가 이리 되었단 말인가? 일국의 공주가 어쩌다가 야반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더란 말이더냐? 으흐흐흐…….’
세희공주가 절룩거리며 흐느끼자 유모는 가슴이 미어졌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손에서 자라온 공주였다. 비록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은 아니었지만 유모는 공주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공주마마, 울지마셔요.”
유모와 젊은 군관에게 들킬까 걱정되어 속으로 흐느끼던 세희공주는 유모가 속내를 알아버리자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으흐, 흐흐흐흑…….”
“공주마마, 울지마셔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유모.”
“네에, 공주마마.”
“차라리, 내가 왕실이 아니라 여염집 여식으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그렇다면 이렇게 야심한 밤길을 걷는 일도 없을 테니까요.”
간신히 말을 마친 세희공주는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공주마마, 마마께서는 아직 이 조선국의 공주이십니다. 누가 뭐라해도 조선국의 상감마마의 장녀 이십니다.”
“공주가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이렇게 아버님의 눈을 피해 야반도주하는 한심한 처지인걸요.”
“상감마마께서 언젠가는 공주마마를 다시 부르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상감마마께서는 성정이 불같으면서도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언젠가는 꼭 공주마마를 다시 부르실 겁니다. 그때까지 옥체 보존하시고 계시면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공주마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난 이제 공주가 아니에요. 영원히 아바마마와 인연의 끈을 끊고 살 겁니다.”
“공주마마,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기다리셔야합니다.
세월이 약이랍니다. 그저 모든 것 잊고 사시면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공주마마,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노량진에 도착해야 하옵니다.”

 무장이 고개를 반쯤 숙이고 세희공주에게 아뢰었다. 세희공주가 다리가 아파 절뚝거리자 젊은 무장은 난감해 했다.
“공주마마, 소신이 마마를 업고 가겠습니다. 소신에게 업히십시오.”
무장이 공주 앞에 꿇어앉으며 등을 내밀었다. 여염집 처자도 아닌 한 나라의 공주 체면에 생전 처음 보는 젊은 남자에게 업힌다는 것은 도저히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주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지친 몸은 무엇이든지간에 의탁하고 싶어하였다.
‘그냥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쳐 버리고 업힐까?’

 서너 식경을 쉬지 않고 걸어 온 공주의 발목은 시큰거리고 한기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늑한 궁궐 생각이 간절했다. 어머니 정희왕후와 상궁들의 보살핌 속에 온갖 호사를 누려온 공주는 하룻밤 사이에 도망자의 처지가 된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공주의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지고 절룩거리는 정도가 심했다.
“공주마마, 소신의 등에 업히소서. 더 이상 무리하시면 옥체 상하실까 걱정되옵니다.”
젊은 무장이 공주 앞에 등을 내밀고 앉았다.
‘그냥 모른 체 하고 업힐까?’
“공주마마, 소신의 등은 바위덩이같이 단단하고 안전하나이다. 안심하시고 업히소서.”
공주가 주저하자 젊은 무장은 공주를 안심시켰다.
‘아, 이렇게 편한 것을…….’

젊은 무장은 감히 공주를 업었다는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밤길을 걸었다. 공주의 하체에서 따뜻한 온기가 젊은 무장의 손에 전해졌다. 무장은 묘한 감정에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감히 지존이신 상감마마의 혈육인 공주마마를 자신의 등에 업었다는 사실에 감격해 했다. 무장은 힘든 줄 모르고 혼자 걸을 때 같이 빠른 속도로 노량진 맞은편 강나루를 향해 달렸다.

두 식경을 걸었어도 젊은 무장은 전혀 지친기색이 없었다. 용산 쯤 왔을 때 하늘이 다시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무장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날이 새기 전에 공주를 한강을 건너 노량진까지 안전하게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대궐을 떠나기 전 중전 정희왕후의 지엄한 명이 무장의 귓가에 맴돌았다.

"세희공주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날이 밝기 전까지 한강을 건너야 하오."
"소장, 중전마마의 지엄한 명을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수행하겠나이다. 안심하소서."
대궐 수비군 중에서 가장 무예에 뛰어나고 발 빠른 무장은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다. 공주 일행이 골목길을 지날 때 마다 개들이 짖어댔다. 거의 강에 다다른 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무장의 이마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을 식혔다.
"무장님, 잠시 쉬어가시지요? 힘드실 텐데……."
세희공주가 자신을 업고 뛰다시피 걷는 무장에게 속삭였다.
"아니옵니다. 공주마마. 어서 강을 건너야 하옵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

'아니 무슨 남자가 저리 힘이 좋단 말인가? 쉬지도 않고 서너 식경을 걸어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으니…….'
유모는 뒤뚱거리며 무장의 뒤를 따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렵게 강에 도착한 공주일행은 나루터가 아닌 곳에 도착하여 수풀이 우거진 곳에 몸을 숨겼다. 강가에 세 사람이 탈 배는 없었다. 젊은 무장은 공주와 유모를 안심시킨 뒤 강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젊은 무장은 두 사람이 겨우 탈수 있는 쪽배를 구해왔다.
“공주마마, 어서 타소서. 간신히 나루터에 매어져있는 배를 가져왔나이다.”
"어머나, 그럼 주인 몰래 훔쳐왔단 말이에요?"
"공주님을 무사히 건너드리고 다시 그 자리에 배를 가져다 놓으면 됩니다. 잠시 빌린 것입니다."
무장이 공주의 옥수(玉手)를 잡고 공주가 안전하게 배에 타도록 하였다. 몸집이 큰 유모가 머저 앉고 세희공주를 품에 안도록 하였다. 무장이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하자 쪽배는 잔잔한 한강의 물살을 갈랐다. 안개가 자욱하게 강 위에 퍼져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쪽배가 강 중간쯤 건너자 바람이 불었다. 파도가 약하게 일어도 쪽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를 탄 세희공주는 욕지기를 느끼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유모, 토할 것 같아요.”
“마마, 조금만 참으셔요. 배 멀미를 하시나 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노량진이옵니다.”
유모는 공주의 등을 다독거려주었다.
‘아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미식 거려 죽겠는데, 남정네 앞에서 토할 수도 없고…….’
“공주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신이 얼른 배를 저어 강을 건너겠습니다. 조금만 참고 견뎌보십시오.”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