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중도강(雨中渡江)

강바람이 불어 올 때 마다 배가 흔들렸으나 세희공주는 욕지기를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름 강바람은 시원하면서도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얼굴에 물방울이 생기게 하였다. 건너편 노량진에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곳은 한양을 방비하는 군사들이 있는 곳이어서 그쪽으로 배를 댈 수 없었다. 무장은 노량진에서 양화나루 방향으로 한참을 더 내려가 수풀이 우거진 곳에 배를 댔다. 공주 일행이 배에서 내리자 서쪽 하늘에서 천둥이 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공주마마, 부디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소신, 더 이상 공주마마를 모시지 못한 죄 두고 두고 속죄하겠나이다. 부디, 부디 옥체를…….”
젊은 무장은 비록 잠깐이지만 공주와의 인연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세희공주는 경복궁에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모시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소임을 다한 젊고 헌헌장부인 무장이 무척 고마웠다. 욕심 같아서는 멀리 동학사까지 자신의 긴 여정에 동행토록 하고 싶었다.

“무사님,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황공하옵니다. 공주마마.”
무사는 공주에게 큰 절을 올렸다. 공주는 끼고 있던 옥가락지를 빼어 무장에게 건넸다.
“이것은 무사님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인연이 닿으면 뵙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마마. 부디 옥체보존하소서. 소신, 공주마마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않겠나이다. 조금만 더 가시면 주막(酒幕)과 민가(民家)가 나타날 것입니다. 마마께서 밤새 걸으시느라 많이 피곤하실 것입니다. 좀 쉬었다 가시옵소서.”

젊은 무사는 감격하여 다시 세희공주에게 큰 절을 올렸다.
“공주마마, 아니 아기씨, 어서 가세요. 혹시 상감께서 보낸 병사들이 뒤쫓아 올지도 모릅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래요. 유모. 어서가요.”
공주와 유모가 강 언덕을 향해 오르려고 할 때 갑자기 뇌성벽력이 쳤다. 공주는 다시 강을 건너는 무장이 걱정되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배는 이미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잠시의 인연이었지만 잘 생긴 무장의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세희공주가 지니고 있던 것이 가락지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노여움으로 보아 다시는 대궐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 같으면서도 먼 훗날 자신이 궁궐로 돌아올 경우 무장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옥가락지를 뽑아 주었다.

“제발 무사님이 무사히 강을 건너가셔야 할 텐데. 나무 석가모니불.”
공주는 두 손을 합장한 채 비바람에 파도가 일렁이는 강을 속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아기씨,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 무장님은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 나갈 늠름하고 강한 사내입니다. 다시 대궐로 돌아가 중전마마께 공주마마의 무사 탈출을 고할 것입니다. 이제부터가 걱정이옵니다.”

새벽이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와 바람으로 한치 앞도 나갈 수 없었다. 세희공주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언덕 위로 기어올라 풀이 무성하게 자라 길을 분간 할 수 없는 강둑길을 걸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걷다가 멈추고를 반복하면서 양화나루를 향해 걸었다. 한식경 쯤 걸으니 저 앞에 시커먼 물체가 나타났다. 빗속에 보이는 물체는 자그마한 초가집이 분명했다. 앞서가던 유모가 소리쳤다.

“아기씨, 저기 민가가 보입니다요. 민가가 분명해요. 얼른 발걸음을 옮기세요. 저 집에서 잠시 쉬어가야 겠어요.”
콰쾅-
“어머나”
천둥소리에 겁에 질린 세희공주가 유모의 허리를 껴안았다. 여느 때 같으면 지금 쯤 나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푹신한 비단금침 위에서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각이었다. 공주는 물에 빠진 생쥐 같은 자신의 몰골에 그만 울음이 나왔다.
“으흐흐, 흐흐흐흐…….”
“마마, 울지마셔요. 앞으로 이보다 더한 고난이 많을 거예요. 독하게 마음잡수셔야 해요.”

간신히 민가의 처마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렸다. 주막도 아닌 민가를 비가 내리는 새벽에 여자들이 문을 두들긴다는 것은 큰 용기를 내야 했다. 유모는 차갑게 식어 덜덜 떨고 있는 공주를 꼭 껴안아주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난 유모가 굳게 문이 닫힌 민가의 허름한 문을 두들겼다.
쾅쾅쾅-
쾅쾅쾅-
아무리 대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인기척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사는 집으로 보기에는 집이 너무 작아보였다.

“유모 추워요. 너무 추워서 못 견디겠어요.”
공주의 이마를 만져본 유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공주의 이마가 펄펄 끓고 있었다.
‘아아, 큰일이로다. 공주마마께서 몸이 편찮으시니 이일을 어찌한담? 그래, 주인이 있든 없든 우선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봐야해.’
“아기씨, 잠시만 참으세요. 쇤네가 들어가 볼게요.”
“남의 집을 주인 허락도 없이 어떻게…….”
유모가 용기를 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 비를 피하기에는 더없이 아늑한 공간이었다. 가운데 무슨 가마 같은 것이 있었지만 유모는 개의치 않았다.

“아기씨, 어서 안으로 드셔요. 안에 아늑하니 비 피하기 딱 좋아요.”
쿨럭, 쿨럭-
세희공주는 기침을 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 온 두 사람은 더듬더듬 거리며, 캄캄한 집 안에 지푸라기 어지럽게 널려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마, 아니 아기씨, 이리 누우세요. 옷이 비에 젖어 물기를 짜야 하겠어요.”

유모는 캄캄한 집안에서 고쟁이만 입은 채 옷을 벗어 물기를 짜내고 공주의 저고리와 치마도 벗게 하여 물기를 짜냈다. 유모는 공주의 차가운 몸을 안아주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 된 두 사람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선잠에 들었던 유모가 이상한 냄새에 눈을 떴다. 공주는 유모의 품에 안겨 잠이 들어 있었지만 냄새에 민감한 유모는 냄새가 너무 심해 잠시도 누워있을 수 없었다. 공주를 살며시 눕혀놓고 유모는 냄새나는 곳으로 손을 더듬거리며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만져지는 가마같이 생긴 것은 상여(喪輿)였다.

헉-
머리칼이 쭈뼛 선 유모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하며 다시 공주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고 손을 옆으로 뻗자 뭔가 물컹하고 이상한 것이 손에 잡혔다. 인골이었다. 반쯤 썩은 시신에서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아악-
유모의 비명소리에 공주는 눈을 떴다.
“유, 유모. 왜 그래?”
“고, 공주마마. 여기서 얼른 나가셔야 합니다. 이곳은 곳집입니다.”

“곳집?”
“상여를 보관하는 고, 곳집입니다. 그리고 썩어가는 송장도 있습니다요. 마마.”
유모는 덜덜 떨면서 말도 하지 못했다.
“송장?”
“어, 어서. 이곳을 나가셔야 합니다. 어서요. 잘못하다간 역병에 걸릴 수도 있어요.”
“역병?”
공주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몸이 굳어 버렸다. 유모는 간신히 공주를 부축하여 곳집을 나와 강둑길을 걸었다.

“아기씨, 많이 놀라셨지요?”
쿨럭, 쿨럭-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비도 그치고 강은 안개에 쌓여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했다. 공주를 부축하여 두 식경 쯤 걷자 나루터가 나타났다.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사공들이 간밤에 내린 비에 배에 찬 물을 퍼내기도 하고 육지에 끌어 올린 배들을 다시 강으로 내리기도 하였다.

주막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벌써 손님을 받는 것 같았다.
“아기씨, 저기 주막이 있네요. 어서 저 주막에 들어 쉬셔야겠어요.”
유모가 주모를 찾자 아직 잠이 덜 깬 삼십 후반의 여인네가 눈을 비비며 부엌에서 나왔다. 주막 마당에는 서너 명의 뱃사공으로 보이는 축들이 모여 간밤에 내린 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공들은 비에 흠뻑 젖은 두 여인을 보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주모, 우리 아가씨가 비를 많이 맞아 신열이 있는데 빈방 있으면 주세요."
"어쩌나, 빈방은 없는데. 저쪽 방이 크긴 한데 남정네 두 명이 조금 전에 들었는데……."
'남정네 둘?'

유모는 남정네가 들어있는 방이라도 공주를 편하게 쉬도록 해주고 싶었다.
"주모, 방삯은 두 배로 줄 테니 방 좀 마련해 줘요. 보시다 시피 우리 아기씨가 신열이 있어 좀 쉬어야 하거든요. 두 남정네를 다른 방으로 가도록 해봐요. 우리 아가씨는 한양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지체 있는 집안의 딸이거든요."
"기다려 보슈."
유모는 이미 남자들 둘이 들어 있다는 방을 향해 갔다.
"유모, 남녀칠세부동석이거늘 어찌 모르는 남자들하고 한 방을 써요?"
"마마, 아니 아기씨, 방이 없다는데 그럼 어쩌겠어요. 방 한쪽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길을 떠나야지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염려마세요. 쇤네가 아가씨를 보호할 테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생면부지의 남정네들과……."
"남자들은 다른 방으로 들게 했으니, 방값은 두 배로 주세유."
주모가 어려운 일을 했으니 그만한 보상은 받아야 하겠다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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