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김종서의 손자

"말씀하세요."

"인생이란 무엇인지요?"

"인생?"

"네에, 인생이 무엇인지 몇 달을 두고 생각해보아도 도무지 해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소승은 이 적막강산 같은 절에 있을 까닭이 없지요."

"그래도 스님은 많은 공부를 해오셨고, 천지만물의 생멸(生滅)에 대하여 도통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허허허허. 그리 보아주셨다면 소승,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스님, 알려주세요. 인생이 무엇인지요?"

"나무아미타불."

스님은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듯 했다. 청년은 스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스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사는 세상을 얼마나 사시었소?"

주지스님께서 청년에게 나이를 물었다.

"올해로 십팔 년을 살았습니다."

"그래 십팔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소?"

"……."

스님의 물음에 청년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천정만 바라보았다.

"스님, 지금까지 저는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으음- 아주 확실한 답변이구먼."

"나무관세음보살. 송구합니다. 스님."

그때 동자승이 차를 끓여 내왔다. 스님은 누워있는 청년에게 차를 권했지만 청년은 나중에 마시겠다고 했다. 차를 다 마시고난 스님은 청년에게 법문을 시작했다.

"나무아미타불. 요즘은 인생에 대해서 가르치려 하는 사람도 없고 배우려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대부분 인생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간답니다. 인생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 동안 겪게 되는 과정을 인생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고명한 학자나 고승대덕도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그 속에 인생의 모든 의미와 존재 가치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네는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주어진 인생의 굴레 속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 목적지를 정한 후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진정한 삶을 모르고 사는 것과 같으며 삶의 의미와 결과가 애매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오늘날 사바세계가 점점 어두운 이유는 중생들 각자 나름대로는 정도를 걷는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실과 동떨어진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기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랍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청년은 주지스님이 법문을 설하는 사이 일어나 앉아 물 흐르듯 이어지는 주지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었다. 주지스님은 잠시 설법을 멈추고 청년의 안색을 살피더니 빙그레 웃으며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스님의 법문은 계속 이어졌다.

"인생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알고 모든 혼란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은 무의미한 돌덩어리가 아니라 완전한 신성에서부터 나타난 것이며 완전한 이법과 뜻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들이 보고 듣고 활동하는 현실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신성한 근원과 높은 차원의 의식이 존재하는 초월계(超越界)와 잘못 된 영혼들이 가는 지옥계(地獄界)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움직임 속에는 그 질서를 완전히 유지하기 위한 순환의 법칙과 인과의 이치가 존재하며 이러한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을 부처님은 정견(正見)이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명의 완성에 이르러 신성과 하나 되신 성자(聖子)들이 지혜의 눈으로 분명히 밝혀 놓으신 일인데 지금은 진리가 흐려지고 사대부중의 마음이 어두워져 이것을 느끼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삼라만상은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나타나며, 원인이 있는 것은 반드시 결과가 따르는 것이 우주의 영원한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한 생을 마쳤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다시 태어나 끝없이 자신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끝없이 계속되는 순환의 과정 속에서 각자의 영혼은 자기가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각자 다른 운명의 근원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개개인이 각기 다른 삶을 산 결과를 자신의 영혼 속에 담아 태어나기 때문에, 똑같은 사물을 보아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 것이 다 다르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청년은 속으로 계속해서 부처를 찾고 있었다. 주지스님은 차를 한잔 마시고 다시 법문을 이어갔다.

"사람의 의식은 자기 속에 자기가 지은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의식이 변화하는 현상을 살펴보면 각각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이 자기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것이 쌓여 의식의 변화를 가져 오게 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어둡고 잘못된 것이 들어가면 그만큼 잘못된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지고, 밝고 좋은 것이 들어가면 그만큼 맑고 좋은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져 그 미래의 운명이 결정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사실로 존재하는 이치 즉 진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모두 자기 속에 남게 되며, 잘못된 모든 원인이 자신의 미래를 불행하게 하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이치를 이해한다면 다시는 어둠을 범하지 않을 것이며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이 이렇게까지 어두워진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진리와 실상의 모습을 알지 못하여 함부로 행동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며, 진실에 대하여 바른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자가 무지한 생각에 옳지 않은 일을 해서 재물을 모았다고 한다면 그 재물은 오히려 그 사람을 더욱 괴롭히는 원인이 되어 온갖 시비와 불행을 불러 올 것이며, 갈등과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생은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깊이 사색하며 찾아내고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성현(聖賢)의 말씀을 따르며 끊임없이 사색을 함으로써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어쩌면 인생은 그 이유를 찾다가 소진해 가는 촛불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이 꺼지기 전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알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면 해탈하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소승이 알고 있는 인생이란 이 정도 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주지스님의 긴 법문이 끝났다. 청년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간신히 일어나 후들거리는 자세로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그럼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그리된 것도 어떤 원인이 있어 그리되셨단 말씀인가? 아냐, 두 분은 매사가 정정당당했고 조금도 잘못된 일은 하지 않으셨어. 그런데도 수양대군한테 목숨을 빼앗기셨어. 법문대로라면 두 분이 이미 잘못될 운명을 타고나셨단 말씀인가?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청년은 머리를 감싸더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스님, 한 가지 여쭤도 되겠는지요?"

"나무관세음보살. 말씀하세요."

"저의 관상을 보아주시겠는지요?"

"허허. 관상이라?"

"네. 저의 관상을 좀 보아주세요."

"나무아미타불. 양이 있으면 반드시 음이 있게 마련이지요."

"네에? 무슨 말씀이신지요?"

"빈도는 관상공부를 하지 않아 관상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관상이 뭐 별거겠습니까?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 골격 등 신체의 외면을 보고 그 사람의 과거나 미래 또는 현재의 운수를 점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요."

"스님, 저의 미래를 살펴주세요."

"나무아미타불. 불자로서 소승은 감히 사바의 인연에 대하여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님, 전 지금 제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 쫓기고 있는 처지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죽고 사는 것은 본인이 지은 업에 따르는 것입니다."

"스님."

"처사는 천수를 누릴 것이오. 그대의 혈육들은 이미 다른 세계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대만큼은 주어진 이승의 시간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은 듯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스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너무 집착하면 아니 됩니다. 인연은 선연이나 악연으로 변질 될 수 있습니다. 악연은 또 다른 악연을 낳을 뿐입니다. 삼라만상의 인연에 의해 태어났다가 인연에 의해 소멸 될 뿐 입니다. 제행무상이지요. 나무아미타불."

주지 스님은 이미 청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스님, 저의 할아버지는 ……."

"나무관세음보살. 처사는 아무 이야기하지 마시고 여기서 몸과 마음을 맑게 하세요. 지금 처사께서 하실 일은 그것이 최선입니다. 처사께서 이곳 동학사에 발길이 닿은 것도 인연이고 앞으로 또 다른 만남도 이미 지어진 숙연입니다."

'아아, 스님은 이미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어쩌면 나의 미래까지도…….'

“스님, 이 어리석은 중생, 스님께 의탁하여 평생 부처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

“스님, 평생을 부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

“스님, 지나간 세월을 모두 잊고 불법에 귀의코자 하옵니다만…….”

“…….”

“스님, 이놈을 제자로 받아 주실 수 없으신지요?”

“…….”

“스님,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전 이제부터 오로지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따르면서 사바와의 인연을 끊고 불법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스님, 스님, 허락해 주세요.”

“…….”

청년의 간청에 주지스님은 눈을 감고앉아 잘 여문 밤알만한 염주 알을 굴리면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방안에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청년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청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혔다. 청년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