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동학사의 기연(奇緣)

 "스님, 부탁이 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말씀하세요. 마마."

"지금부터 소녀를 그냥 아기씨라고 불러 주세요. 저는 이미 아바마마에게 버림받은 자식입니다. 그냥 여염집 소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냥 아기씨라고 불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중전인 정희왕후로 부터 공주의 전후사정에 대하여 전갈을 받은 주지스님이지만 호칭을 여염집 처자처럼 아가씨로 불러 달라는 세희공주의 부탁을 듣고 당황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아미타불. 마마, 잘 알겠습니다. 그리 부르겠습니다. 어서, 요사채로 드시지요. 먼 길 오시느라 몹시 피곤하실 텐데요."

"그런데 스님, 달님이 밤길을 환하게 비춰주시는데 왜 등불을 드셨어요?"

"나무관세음보살. 등불은 어두움을 비추는 존재입니다. 비록 달이 떠있다고는 하나 귀한 분이 오시는데 어찌 등불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소승은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닌답니다. 또한 이곳 계룡산은 너무나 험하고 깊은 산이라 산짐승들이 많습니다."

"네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스님. 이리 마중을 나와 주셔서요."

"나무관세음보살."

주지스님은 공주와 유모를 모시고 산사로 돌아갔다. 청년은 멀찌감치 네 사람과 일정 간격을 두고 뒤를 밟았다.

동학사에 온 뒤로 세희공주는 두문불출했다. 하루 종일 요사채에 들어 앉아 오로지 아미타경(阿彌陀經)과 지장경(地藏經)을 읽으며 아버지 수양의 손에 비명횡사한 수많은 영혼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궁궐에 있을 때부터 공주는 늘 불경을 접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아랫사람들의 웬만한 흠은 덮어 두거나 모르는 체 하여 보이지 않는 자비를 베푸는 등 궁녀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보살로 통하였다.

딸의 독실한 불심에 어머니인 정희왕후 역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다. 중전 전에 불상을 모시고 밤낮으로 지아비와 자식들의 안녕을 빌었다. 사남매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여 종종 형제간에 부왕의 정사(政事)나 국가의 대소사를 놓고 언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세희공주를 무사히 야반도주 시킨 중전은 공주가 무사히 동학사에 도착하였는지 몹시 궁금하였다. 공주를 야반도주 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내금위(內禁衛) 소속 위장(衛將)을 중전은 총애하여 중전이 궁궐 밖으로 행차를 하거나 궁궐 내 행사가 있을 때면 위장에게 자신을 호위토록 하였다. 세희공주가 대궐을 떠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밤 중전은 위장을 중궁전으로 은밀히 불렀다.

“중전마마, 신 박경언, 대령하였습니다.”

“오오, 어서 오세요. 박 위장, 별고 없지요?”

“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위장께서 계룡산 동학사에 좀 다녀오셔야 겠어요. 세희가 잘 도착하였는지 몹시도 궁금하고, 그 애 건강상태는 어떤지 또 하루 밥 세끼는 차려 먹는지 여러 가지가 걱정이 되는구려.”

중전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한숨을 쉬었다.

“중전마마, 너무 걱정하지마소서. 소장이 동학사엘 다녀오겠나이다."

"고맙구려. 내 그대의 충심에 언젠가 꼭 보답하리다.”

“황공하여이다. 중전마마.”

“그럼, 내일 아침 다시 들려주세요. 위장 편에 전할 것이 있어요”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중전마마.”

“그대가 동학사를 다녀오는 일을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절대 아니 되오. 명심하세요.”

조정에서는 김종서와 황보인을 따르던 세력들과 완전히 잡히지 않자 김종서와 황보인의 친인척들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전국 팔도에 내렸다. 지방의 수령들은 공을 세우기 위하여 산속 깊이 있는 사찰과 암자, 동굴, 화전 민가까지 이잡 듯 수색하였다. 심지어 전라도와 경상도 제주도등 섬 지방 까지 병사들을 파견하여 충신들의 혈족들을 잡기 위하여 혈안이었다. 소문은 곧 동학사에 숨어있던 청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아아, 여기 숨어 있다가 관군에게 잡히는 거 아닌가? 그러나 절보다 숨어 지내기 좋은 곳도 없는데. 여길 떠나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리고 곧 만나게 된다는 귀인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며칠 전 이곳에 온 그 여인은 나와 숙연이 닿았다는 귀인은 아닌 것 같은데…….’

청년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 청년의 사정을 잘 아는 주지스님은 청년에게 가급적 낮에는 경내를 돌아다니지 말고 새벽 일찍 천황봉이나 연천봉 또는 깊은 계곡에 은거하고 있다가 밤에 내려오라고 하였다. 어느 날 청년이 새벽에 용문폭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밤이었다. 늘 다니던 동학사 뒤편 암자를 지나려고 하는데 암자 앞에 있는 남매 탑을 돌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상현달이 산봉우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염주를 손에 감고 합장한 채 여인은 속으로 경전을 읊고 있었다. 청년은 멀리서 여인이 탑돌이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졌다. 자신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청년은 능인보전(能人寶殿) 앞 석탑에서 탑돌이 하던 여인이 생각났다.

'그래, 그때도 묘령의 여인이 보름달 뜨는 초저녁이면 나타나 나의 관심을 끌곤 했었지. 그 처자는 지금쯤 극락왕생했을까? 나에게 잘 대해주었는데…….'

청년이 공부하다 머리가 무거울 때면 능인보전에 들어 부처님의 상호를 바라보며 멀리 한양에 있는 부모님을 생각하거나 부처님께 천배를 올리며 과거급제를 할 수 있도록 자비를 기대하곤 했다.

우연히 보름달 뜨는 어느 초저녁 청년은 묘령의 여인이 능인보전 앞에서 탑돌이 하는 여인을 보게 되었고 청년은 그 여인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여인은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자주 함께 탑돌이를 하면서 자연히 인사를 건네는 사이가 되었고 오래지 않아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여인은 유점사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데 얼마 전 역병으로 지아비를 잃고 부처님께 귀의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청년의 설득으로 마음을 접고 하산하게 되었고 이후로 여인은 자주 유점사에 들려 청년의 옷가지며 보약을 지어와 청년에게 전해주곤 하였다.

청년의 여인의 정성에 감복하여 종종 유점사를 내려와 여인과 함께 밤을 지새우곤 했다. 여인은 대 저택에서 몸종과 둘이 살며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후 청년이 과거공부를 마치고 유점사에서 나와 한양으로 가는 길에 잠시 그 여인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서방님, 저는 세상을 살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저와 이곳에서 천년만년 함께 살면 아니 되겠는지요?"

청년은 며칠을 두고 고민하였지만 한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과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여인의 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청년과 마지막 밤을 보내던 날 새벽 청년이 막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여인은 대들보에 목을 매었다.

혼비백산한 청년은 가슴을 치며 후회하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누가 볼까 겁이나 청년은 여인의 시신을 반듯하게 이불위에 누이고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와 한양으로 향했다.

'서방님, 저는 세상을 살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아, 그때 내가 며칠만 더 머물렀어도 그 여인이 죽지 않았을 것을……."

청년이 중얼거리며 탑돌이 하는 여인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청년은 그때 그 여인과 비명에 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혼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서 탑돌이를 하고 싶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

‘아, 저 여인이 반야심경을 읊고 있구나.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 야심한 시각에 탑돌이를 한단 말인가?’

청년은 또 다른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뒤를 따르며 반야심경을 외우며 탑돌이를 하였다. 장소와 시간이 다를 뿐 자신이 금강산 유점사 능인보전 앞에서 탑돌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여인의 얼굴이 궁금했다. 염불을 외면서 큰 기침을 하고 인기척을 냈지만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계속 탑을 돌고 있었고 청년도 여인과 십여 발짝 간격을 유지하며 탑을 돌고 있었다. 여인의 염불이 잠시 멈추면 청년은 여인의 뒤를 이어 염불을 이어나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서 여인의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며칠 전 밤 우연히 본 그 여인이 틀림없었다.

'꽤 지체가 있어 보이는 가문의 여식 같아 보였는데. 이 밤에 잠도 못자며 탑돌이 하는 여인과 나와는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냐, 우연이겠지. 몸이 아파 휴양차 이곳에 왔거나 주지스님과 예전부터 무슨 관계가 있어서 왔을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저 여인에게서 알 수 없는 기가 느껴지지? 마치 나를 잡아끄는 이상한 힘이 느껴져.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참으로 이상해…….'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이며, 어째서 내 뒤를 따르며 같은 반야심경을 읊고 있는 것 일까? 내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내 뒤를 이어 염불을 하다니 참으로 기이하구나. 궁금한데 누굴까? 이 밤에…….’

공주는 갑자기 자신의 뒤를 따르며 염불을 하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야심한 밤에 우연히 같은 염불을 외며 탑돌이를 하게 된 기이한 인연을 공주는 이미 예정 된 인연 같다고 생각했다. 공주와 청년은 쉬지 않고 탑을 돌았다.

이승에서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친 혈육들이 깊은 밤,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탑돌이를 하는 기연(奇緣)에 대하여 부처님만이 그 깊은 사연을 아실 것 같았다. 그때 멀리서 주지 스님이 남녀의 탑돌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스님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 반야심경을 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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