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수어지교(水魚之交)

"왜 언젠가 아기씨께서 야심한 밤에 함께 동학사 뒤편 남매탑을 돌던 그 총각 말이에요. 아주 헌헌장부의 옥골선풍의 그 청년이 어찌된 일인지 통 안 보이네요. 쇤네가 경내 이곳저곳을 다녀 보아도 거의 한 달째 그 청년이 통 보이질 않아요. 그 청년에게 무슨 일이 일 생긴 게 아닐까요?"

"그러게. 나도 그 처사님이 안 보여 궁금한데.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공주는 유모에게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아 잠시 얼굴을 붉혔다. 비록 탑돌이를 함께 하였지만 마치 먼 꿈속에서 항상 곁에 있던 사람 같았다. 잠시지만 불빛에 얼핏 본 청년의 얼굴은 세상의 사람이 아닌 천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 공주는 청년이 동학사를 떠난 지 며칠 안 돼 청년이 안 보이자 청년의 행방이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그분에게서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 마치 내가 이 전 부터 그 분을 만나기 위하여 이곳을 온 것 같았고, 아버지에게 내침을 당한 것도 그분을 만나기 위한 과정인 것 같았어. 그래, 분명 나와 그분 사이에는 끈끈한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해.'

"아기씨, 누굴 생각하셔요? 무장님? 아니면 그 총각?"

"유모, 얼른 찬물이나 한 대접 가져와요. 목이 말라요."

"왜 안 마르겠어요? 당연히 마르시겠지요. 헤헤헤헤......."

"유모?"

"보살님계세요?"

유모가 막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밖에서 동자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살님, 주지스님께서 뵙자고 하세요. 대웅전으로 드시라고 하시는데요."

'주지스님께서 무슨 일일까?'

"유모, 곧 간다고 전하세요."

공주가 단정히 몸단장을 마치고 대웅전에 들었을 때 주지스님은 눈을 감은 채 묵주 알을 돌리며 참선에 들어있는 듯 했다. 공주는 주지스님의 참선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관세음보살보문품원경을 읽어내려 갔다.

어떤 사람이 해치고자 하여 큰 불구덩이에 떠밀어 떨어진다 하여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불구덩이가 문득 연못으로 변할 것이며, 혹은 바다에서 표류할 때 용이며 고기떼와 모든 귀신의 난이 있을 지라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간절히 일심으로 생각하면 물결도 잔잔할사 되살아 날 것이며, 혹은 천만길 높은 산봉우리에 있을 때 웬 사람이 별안간 벼랑으로 떠밀더라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햇빛 같이 허공으로 살포시 날아 내릴 것이다.

악인에게 쫓긴바 되어 놀란 결에 험한 골짜기에 떨어질 때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털끝 하나 절대로 다치지 않을 것이며, 혹은 원수나 도적떼들이 제각기 칼을 잡고 해치고자 하여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상대가 도리어 자비심을 일으킬 것이며, 혹은 억울하게 왕에게 죄를 받아 형장에 끌려가 칼을 받아 목숨이 끝나는 때라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칼이 조각조각 나버리며, 혹은 나무칼에 갇히고, 수족에 수갑과 족쇄를 채워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주술과 독약으로써 해치고자 하는 자가 있어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도리어 그 해독이 해치고자 하는 자에게 돌아가며, 혹은 악한 나찰과 독룡과 귀신 떼를 만날 지라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때를 알고 감히 해치지 못할 것이며, 만약 사나운 맹수들이 에워싸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공포를 주어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저 변방으로 달아나 없어질 것이며, 살모사와 독사며 쏘는 독충들이 불꽃같은 독기를 뿜고 덤벼들지라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스스로 돌이켜 사라질 것이며, 뇌성벽력 우르릉 번개가 치고 우박이며 큰 비가 쏟아질 때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이내 하늘은 맑게 개일 것이다.

중생이 곤액을 당해 한량없는 고통이 뼈에 사무친다 하여도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일심으로 생각하면 관세음보살의 미묘한 지혜의 힘이 능히 이 세상 모든 고통에서 구해줄 것이며, 신통력 구족할 사 관세음보살, 지혜와 갖은 방편 널리 닦아 시방의 모든 국토에 아니 나투는 곳이 없으며, 여러 가지 육취 중생들 지옥이며 아귀와 축생들까지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윤회의 고통을 차츰차츰 없애 주리라.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공주의 관음경 낭송을 잠자코 듣고 있던 주지스님이 눈을 뜨고 공주를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무관세음보살. 마마 납시셨습니까?"

"나무관세음. 스님, 아기씨라고 불러달라고 청하였잖아요. 혹여 소녀가 스님의 참선에 방해가 되지 않았는지요?"

"아니옵니다. 아기씨 독경소리가 너무 좋았습니다. 천 번 만 번 들어도 전혀 질리지 않는 맑고 영롱한 말씀이십니다."

"소녀, 스님의 부름을 받고 대웅전에 들었나이다."

주지스님은 공주를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기씨, 인연이란 함부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옵니다."

공주는 인연이란 밑도 끝도 없는 화두를 꺼내고 잠시 부처님의 상호를 바라보고 있는 주지스님에게서 무슨 이야기가 이어서 나올지 궁금했다. 공주는 주지스님의 법문에 질문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기그릇이 있습니다, 그릇이 떨어져 깨지면, 떨어뜨려 깨졌다 라 생각합니다. 곧 누군가 밀어뜨려 넘어뜨려 깨진 것이니, 원래 깨진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으나 그릇은 깨지게 되어 있고, 비록 쇠로 만들어 졌다 해도 부식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산화 작용 같아 그 원인은 결국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란 것을 부정 해선 아니 되며, 그릇은 외부적인 작용에 의해 깨어지며, 부식 되는 것이 아닌 본래의 자성(自性)이 있어 깨어지게 되어 있듯, 우리 네 인생도 생각의 분별이 존재하기에 결국 자성이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순리입니다.

삶이 괴롭다는 건 결국 괴로움을 이겨 즐거움을 찾으려는 것이기에 괴롭다는 건 무엇일까요? 보고 싶어, 배가 고파, 헤어져서, 병이 들고, 가지고 싶은 것 가지지 못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내 자신을 한탄하고, 늙어서 괴롭다 하는 것은 결국 이 모든 원인을 다 없애고 즐거움을 찾기란 힘이 듭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개조되지 않으면 아니 되며, 행복해 지려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하면 아니 되고, 그 원인은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하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공주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계속해서 부처님을 찾았다.

"우리는 그 누구를 미워해도 아니 되며 , 본래의 자성의 원리는 우주와 같아 그 원인을 제거하고자 우주의 원리를 변하게 할 수는 없는 이치입니다. 이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근본이기에 모든 게 너 때문에 그러하며 하늘이 어떠하며, 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만의 고립 속에 얻고자 하는 길은 멀어지기만 할 것 입니다 .

변함은 영원한 것이기에 부정한들 오지 않는 것도 아니며 , 곧 자기 자신이 변하여야 하며 내 마음이 곧 자성(自性)이라 함은 부처도 될 수 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제행무상의 참뜻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며 변하며 무상한 것은 자연의 순리인데 어찌 하늘이 땅 아래 있길 바랄까요. 결국엔 자신의 성찰의 본 모습 자성(自性)의 습득입니다.

삶도 결국엔 변하며 그걸 알고 대처하는 방법은 바로 본인의 몫이기에 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내 모습 결국 내모습의 모습이며, 본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먼지가 묻으면 먼지 묻은 내 모습, 예쁘게 치장을 하면 치장한 내 모습, 변하는 건 결국엔 내가 행한 모습 입니다. 아기씨께서 조선국의 공주이시다가 지금은 폐서인이 되셨지만 속내에는 상감마마의 피와 정기가 흐르고 있나이다. 상감께서 피를 부르셨고 그 피 바람은 곧 더 큰 피 바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피는 피를 부르고 그 악행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눈물과 눈물로 연결됩니다. 아기씨 역시 피바람의 역풍을 맞으셨습니다. 아기씨 속내에 아직도 조선국의 공주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순간부터 버리셔야 합니다. 이미 아기씨께서는 새로운 인연을 만드셨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공주는 새로운 인연이 무엇이며 그 대상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법문하는 스님의 말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아기씨께서는 지난 달 밤에 어떤 청년과 남매탑을 도신 적이 있으시지요?"

"네에. 스님."

공주는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과 그 청년 그리고 유모만 그때의 일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주지 스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에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기분이 들었다.

"그 청년과 아기씨는 천생연분이옵니다."

"네에? 천생연분이요?"

"그러하옵니다. 그분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삼세의 숙연이옵니다."

"숙연?"

공주는 주지스님의 이야기를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점점 흥미로웠다.

"아기씨와 그 청년은 수어지교(水魚之交)같은 인연입니다."

"수어지교?"

"그러하옵니다. 아기씨께서 그날 밤 남매탑 돌이할 때 그 청년이 뒤 따르며 반야심경을 읊은 것도 모두가 아기씨와 끈끈한 인연이 있기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옵니다."

"스님, 소녀가 어찌하여 그분과 수어지교의 인연이 있는 것인지요?"

"나무아미타불. 소승이 어찌 그 연유를 알겠나이까? 하오나, 분명한 것은 그 분과 아기씨는 이미 전생에서 부터 맺어진 인연이 있사옵니다."

"전생에서?"

"네에, 그러하옵니다. 그분의 혈족들은 상감마마의 손에 멸족을 당하다 시피 하였습니다. 다행히 부처님의 가호로 간신히 그 분만이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공주는 현기증이 이는 것처럼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면, 그 분이 황보인이나 김종서대감의 혈족이란 말씀인가요?"

"삼라만상은 모두 이유가 있어 나고 이유가 있어 사멸해 가옵니다.

아기씨와 그 청년이 이곳에서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옵니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만남이옵니다."

공주는 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처럼 잠시 몽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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