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바스에서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정은의 시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춥다. 처음으로 집안에 수도가 두 번이나 꽁꽁 얼었고 두 번이나 사람을 불러서 녹여야 했다. 날씨가 꼭 세상인심을 대변한 것만 같다.

올 겨울만큼이나 정치와 사회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면 정치적으로는 북한과의 갈등이 그렇고 사회적으로는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렇다. IMF때보다 더 심한 경제 불황으로 장사하시는 분들이 힘들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데 거기에 최저임금이 너무 많이 올라서 장사를 접는 경우가 많다고 불만이 많았다.

집주인은 빈 상가로 혹은 세를 내려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구청에서는 세금을 더 걷고자 환경분담금이니 보유세니 떠들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차고 있다. 또한 청년들은 취업이 안 되어 가상화폐로 투자했다가 망하고 사회에도 한파가 얼마나 심한지 사람들이 혹독하게 얼어붙었다.

크레바스는 대부분 빙하의 장축방향에 대해 형성되고, 간혹 얼어붙은 눈에 의해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눈에 의해 덮여 영화에서 보면 눈 위를 등산하다가 추락하는 무서운 장면이 생생히 떠오른다. 발을 헛디디지 않기를 기도한다. 인들은 누구보다도 예민하여 2018년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대부분 가슴마다 냉동된 현상들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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