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월하정인(月下情人)

'아, 무서운 일이다. 유점사에서 인연이 된 그 죽은 여인과 어찌 이리도 닮았단 말인가? 마치 그 여인이 환생한 것 같구나. 그 여인이 허공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청년은 인연의 무서움에 대하여 치를 떨면서 여인과 부디 선연(善緣)이길 빌었다. 청년 역시 공주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유모가 두 사람에게 충분한 대화의 시간을 주기 위하여 휘적거리며 비둔한 몸을 뛰다시피 하여 먼저 동학사를 향하여 내려갔다.

서녘으로 조용히 두 남녀의 발걸음을 밝히던 보름달이 갑자기 먹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산길은 캄캄하여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앞서 걷던 공주가 휘청하더니 앞으로 넘어졌다.

"어머나, 아버지."

"보살님, 괜찮습니까?"

"발목을 삐었나봐요."

"저런, 험한 산길에서 다리를 삐시다니요? 아, 큰일 났네."

청년은 갑작스런 일에 당황하였다. 구름 속으로 숨은 보름달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는 넘어진 충격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아아, 어쩌나? 동학사까지 가려면 한 식경은 가야하는데…….'

"보살님, 등에 업히세요. 다리가 부어오를 테니 얼른 내려가 찜질을 해야 합니다."

청년이 공주 앞에 엎드리더니 바위보다 단단한 등을 들이 밀었다.

"괜찮습니다. 어서 업히세요. 이대로는 걸어가시기 어렵습니다. 내가 보살님을 동학사까지 업고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곧 유모가 올라 올 것입니다. 처사님께서는 소녀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내려가세요."

"이 험한 산골짝에 보살님만 남기고 어떻게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아니 되옵니다. 어서 업히세요."

그때 가까이서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공주는 겁이 덜컥 났다.

'아아, 어찌하나? 이 남자에게 업혀야 하나 아니면 유모가 되돌아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숲속에서 공주와 청년을 지켜보던 검은 그림자들은 숨을 죽이며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살님, 어서 내려가야 합니다. 산짐승들이 가까이 있어 위험합니다. 어서 업히세요."

공주가 마지못해 청년의 만세반석같은 등에 업히자 청년은 평소 걷던 상태로 가뿐히 동학사를 향해 내려갔다. 공주는 한양을 야반도주하던 날 밤이 생각났다.

'그날도, 무장에게 업혀 한양을 빠져나왔건만…….'

청년은 말없이 동학사를 향해 걸었다. 그때 보름달이 환하게 남녀의 밤길을 비추었다. 세희공주의 보드라운 둔부(臀膚)의 온기가 청년의 손에 전해졌다. 청년은 공주를 업고 산을 내려오면서 금강산 유점사의 여인을 생각했다.

그 여인이 무르익은 칠월의 꽃이라면 공주는 함초롬히 이슬을 맞고 막 피어나는 백합 같았다. 공주 역시 억센 남자의 강한 체취를 느끼며 묘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아, 이리도 편하고 아늑한 것을…….'

"보살님, 좀 어떠신지요?"

"발목이 시큰거려요. 발목을 크게 삐었나봅니다. 송구합니다. 소녀가 공연히 처사님께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도 인연인 것을요."

"나무관세음보살. 처사님, 천천히 가셔요. 산길이 험해요."

"괜찮습니다. 매일같이 산길을 걷는 걸요. 이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공주에서 걸어오던 길이었습니다. 걷는 일에는 이골이 났답니다."

"처사님, 인연이라는 것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지요?"

공주가 인연이라는 말을 꺼내자 청년은 콧날이 찡했다. 유점사에서 알게 된 여인도 지금 자신의 등에 업혀있는 여인도 모두가 전생에 깊은 인연에 의해 자신과 끊을 수 없는 연이 맺어져 있었고, 지금 등에 업혀있는 여인은 자신과 숙연(宿緣)이 얽히고 설켜있어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두 사람 사이의 매듭을 풀어야 했다.

남도를 방랑하다가 동학사를 다시 찾아 든 것도, 금강산에서 백골을 끌어안고 열락의 밤을 보냈던 것도, 자신의 짧은 시간과 공간이 숙연이라는 말에 얽매여 있는 것도, 인연에 의한 것이었고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일도 역시 삼생에 지은 업에 의한 결과물이란 생각에 이르자 청년의 두 뺨으로 공주 몰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청년이 감정에 복받쳐 흐느끼는 것을 감지한 공주 역시 가슴이 뭉클했다.

두 사람은 마치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호흡소리와 헛기침으로 서로의 감정을 전했다. 두 사람과 사오 십보 간격을 두고 서너 명의 검은 그림자가 숨을 죽이며 뒤따르고 있었다.

"처사님, 동학사에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혼자서 걸어 볼게요. 행여 누가 볼까 두렵사옵니다."

"아니옵니다. 보살님께서는 다리를 다치셨으니 누가 뭐라고 할 일도 없을 겁니다. 그냥 이대로 동학사까지 모실 테니 그냥 계세요."

"아니에요. 저기 나무 밑 바위에 소녀를 내려 주셔요. 잠시 쉬어가야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기서 잠시 쉬어가시지요."

달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노송 아래 공주를 내려놓고 청년도 곁에 앉았다. 공주의 얼굴이 자꾸 일그러지는 것 같아 청년은 안타까워했다. 또 무언의 침묵이 소리 없이 흘렀다. 구름 속에 숨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두 사람 머리 위로 은설(銀雪)이 뽀얗게 쌓였다. 숲속에서 수많은 풀벌레들이 두 사람의 해후를 반기기라도 하는 듯 일제히 아름다운 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처사님, 소녀가 무거워 힘드셨지요?"

"아니옵니다. 보살님. 발목은 좀 어떻습니까?"

"통증은 없는 것 같은데……."

"보살님, 발을 이 위로 올려놓으세요. 내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괜찮아요. 내려가서 스님께 보이면 금방 낫게 해주실 거예요."

"괜찮습니다. 발을 이리 내보세요. 지압으로 치료가 가능한지 보겠습니다."

공주가 마지못해 발을 보여주자 청년은 공주의 발을 무릎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복숭아 뼈 위를 세게 누르고 갑자기 발목을 잡아 당겼다.

아야-

공주의 비명소리와 함께 발목에서 뚝 소리가 났다.

"삔 게 아니고 약간 타박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정말요? 처사님은 의술도 익히셨나봅니다?"

“…….”

“아, 달도 밝네.”

공주가 네모반듯한 바위에 앉아 서산을 향해 흐르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빠진 듯, 한 숨을 길게 쉬기도 하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청년은 공주가 앉아있는 자리 곁에 서서 역시 달을 바라보면서 잠시 시름에 잠겨 있었다.

"저 달님은 천년 후에도 오늘 밤 처사님과 소녀가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어느 소녀가 우연히 만난 헌헌장부님을 사모하다가 끝내 상사병이 들었다는 사연과 무심한 장부님은 소녀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저 돌탑처럼 변함이 없었다는 슬프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오랫동안 기억하시겠지요?"

청년은 공주의 투정과도 같은 이야기에 얼굴을 붉혔다.

"보살님, 저와의 숙연을 이미 알고 계셨군요?"

"서방님, 이승에서 소녀가 유일한 천생연분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서방님? 아아, 내가 또 한 여인의 가슴에 못이 박히게 하는 건 아닌지? 나 한 사람으로 인하여 또 다른 영혼이 상처를 받아서는 아니 되는데…….'

"소녀, 서방님이 동학사를 떠나신 후 하루도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없었사옵니다. 불철주야 부처님 전에서 서방님이 속히 돌아오시기를 빌고 빌었나이다."

‘나를 위하여?’

흑 -

공주는 달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미안하오. 정말로 미안하오.”

"소녀, 주지스님으로 부터 서방님께서 소녀와 삼세의 숙연을 맺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사옵니다. 이제부터라도 그 삼세의 숙연을 아름답게 맺고 싶습니다. 소녀의 간청을 뿌리치지 마소서."

공주가 청년 앞에 엎드려 절을 하니 청년은 당황하였다. 가까이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구름 속에 숨어있던 달이 살며시 웃으며 두 사람을 환하게 비추었다.

"보살님, 이러지 마세요. 나처럼 보잘 것 없는 놈에게 절을 하시다니요?"

"아니옵니다. 소녀, 서방님의 여인입니다. 앞으로는 소녀를 외롭게 놓아두지 마세요."

청년은 여인에게 자신의 가문을 소개하고 싶었으나 꾹 참기로 하였다. 동학사를 떠나기 전 잠시 보았던 여인은 왕실과 인연이 깊어 보였으나 묻지 않기로 했다. 혹여 자신의 물음에 여인이 답을 하지 않으면 괜히 여인과의 관계가 서먹해질까 걱정되었다.

"보살님, 동학사가 가깝습니다. 얼른 내려가시지요. 혹 누가 볼까 두렵습니다."

청년은 공주의 구애가 관심 없는 듯 앞서서 걷기 시작하였다. 공주와 청년이 남매 탑을 내려왔을 때 주지 스님이 두 사람을 뵙자는 전갈을 동자승이 전했다.

'주지스님께서 내가 다시 올 것을 이미 알고 게셨단 말인가? 과연 도통한 분이라 천리안을 지니셨나 보구나.'

두 사람이 동자승이 안내하는 대웅전에 들었을 때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열 명도 더 되는 스님들이 정갈하게 가사와 장삼을 정제하고 좌우로 앉아 불경을 앞에 놓고 조용히 독경하고 있었고 가운데 높은 상좌에 주지 스님이 앉아 삼매에 빠져있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공주와 청년이 인기척을 내며 대웅전에 들자 주지스님은 상좌에서 내려와 공주와 청년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올렸다.

"나무아미타불.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 제가 다시 동학사에 올 것을 어찌 아셨는지요?"

청년이 주지스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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