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청실홍실

"이심전심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을 믿고 따르면 무엇이든지 서로 통하는 법이지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과연 그러하옵니다."

공주와 청년이 주지스님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자 주지스님은 두 사람을 가운데 앉도록 했다.

"스님, 어인일로 소녀와 처사님을 부르셨는지요?"

"두 분께서는 오늘 밤 안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동이 트기 전에 멀리 떠나셔야 하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 분의 목숨이 위태롭게 됩니다. 나무아미타불."

"네에? 저희 두 사람이 오늘 밤 안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하다니요?"

세희공주는 얼이 반쯤 나간 표정이었다. 청년은 담담한 표정으로 주지스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미 예정 된 일이 시작되었다는 듯 묵묵히 스님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나무관세음보살. 두 분 조상님들께서 심어놓은 인연의 질긴 끈이 오늘에서야 이어졌습니다. 두 분께서는 연리지와 비익조처럼 한쪽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미 삼생을 통해 이어져 온 숙연이옵니다. 두 분의 숙연은 악연을 선연으로 풀어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한 가문이 또 다른 한 가문을 핍박하고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폐허 위에 아름다운 만수화(萬壽花)를 피워내 오랜 악연과 업장을 소멸하셔야 합니다."

비록 공주와 청년은 묵묵히 주지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으면서도 스님의 말뜻을 백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오늘 밤 안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하는 사연이 알고 싶었다.

"스님, 어찌하여 오늘 밤 안으로 저와 보살님이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하는지요?"

청년은 주지스님과 시선을 맞추었다. 주지스님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마치 커다란 바위처럼 법석(法席)에 앉아 곧 해탈에 들 준비를 마친 사람 같아 보였다.

"두 분께서는 북두칠성의 탐랑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밤을 넘기면 북두칠성의 제 칠성인 파군성(破軍星)의 급살(急煞) 기운이 성하게 되면서 탐랑성의 정기를 빼앗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두 분에게 요사스러운 기운이 스며들어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가 있으니 오늘 밤 자정이 지나기 전에 부부의 연의 맺어야 안전하옵니다. 하나의 파군성이 두개의 탐랑성을 감히 해치지 못하옵니다. "

공주와 청년은 주지스님의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깊은 시름에 잠겼다.

'아아, 어찌. 어마마마에게 고하지도 못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한단 말인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이미 예정된 일이라면 회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공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웅전 바닥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가늘게 몸을 떨었다. 얼굴이 파르르 떨리더니 비장감이 흘렀다. 공주의 뺨이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면, 피해가야 한다. 그러나 이 여인과 오늘밤 안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하는 일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인륜지 대사를 어찌 이리 가벼이 치러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정녕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어찌해야하나? 스님 말씀대로 이 여인과 오늘밤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하나?'

"나무관세음보살. 따로 두 분이 초야(初夜)를 치를 안식처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또한 내일 새벽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시고 두 분께서는 길을 떠나셔야 합니다. 소승이 준비한 편지를 여기를 떠나 내일 저녁나절이 되거든 읽어보시기 바립니다."

주지 스님이 편지를 공주에게 내밀었다. 봉투가 여염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겉보기에도 상당한 세도가의 양반가들이 사용하는 재질이 좋은 종이로 만든 봉투였다.

이미 공주와 청년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은 감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주지스님에게서 부부의 덕목과 인연의 소중함에 대하여 법문을 듣고 대웅전에서 나왔다. 먼 길 떠날 차비를 마친 공주와 청년 그리고 유모는 동자승이 안내하는 곳으로 말없이 따라나섰다. 동학사를 나와 한참 내려가니 민가 서너 채가 나타났다. 동자승이 어느 아담한 기와집 앞에 발길을 멈추더니 합장을 하였다.

"나무아이타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지스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한 물건입니다."

동자승이 괴나리봇짐 같은 것을 청년에게 내밀었다. 봇짐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꽤나 묵직해 보였다. 동자승이 바람같이 사라지고 세 사람은 대문 앞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보살님, 어찌할까요?"

"……."

공주가 머뭇거리자 청년이 대문 앞으로 다가서더니 힘차게 문들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청년이 대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두 번 외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중년의 남자가 문을 열며 일행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자그마한 정원이 나타났고 아름답게 지어 진 안채가 나타나고 안방에서 은은한 불빛이 문을 통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남자가 공주와 청년은 안방에 들게 하고 유모는 행랑채에 들도록 하였다.

"아니 됩니다. 우리 아기씨는 쇤네가 모셔야 하옵니다."

"유, 유모……."

"두 분께서는 오늘 밤 초야(初夜) 의례를 치르셔야 하옵니다. 유모되시는 분은 방해하지 마시고 행랑채에 드시어 쉬시기 바랍니다. 보살님과 처사님을 위하여 옆방에 목욕물을 데워 놨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절도가 있었으며 감히 말대꾸하기 어려웠다.

'초야의례?'

유모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유모, 저는 서방님을 모셔야 하니 그리하세요."

'서방님? 아니 공주마마께서 실성을 하셨나? 갑자기 오랜만에 도깨비처럼 나타난 남자에게 서방님이라니?'

"유모, 이 분은 나와 삼세의 연(緣)이 있는 분으로 오랫동안 사모해왔습니다."

공주는 유모의 손을 잡아끌고 뒤꼍으로 갔다.

"아기씨, 그럼 쇤네는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나요?"

"유모는 행랑채에 들어가 있어요. 내가 필요하면 부를 테니……."

"알겠어요. 쇤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두 분, 편히 쉬세요."

행랑채로 가는 유모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공주와 청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마치 귀신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공주의 초야를 먼발치에서 바라봐야하는 유모는 가슴이 아려왔다. 어릴 때부터 친자식처럼 젖을 먹여 키우고 한 여인으로 태어나도록 온갖 정성을 바친 유모였지만 공주와 청년이 오늘 밤 안으로 초야를 치루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에 유모는 신랑 신부가 행복하고 잘 어울리는 원앙이 되기를 빌었다.

'아아, 중전마마가 이 사실을 아시면 나를 질책할 텐데. 그러나 공주마마의 뜻이 완강하니 말릴 수도 없고 …….'

"두 분께서는 안으로 드셔서 부부의 예를 치르소서. 소인은 이 집의 집사로 동학사 주지스님의 부탁을 받고 두 분께서 부부의 예를 올리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뒷바라지를 하겠습니다. 혹여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소인을 부르소서.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남자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두 사람만 마당에 남았다. 공주와 청년은 안으로 들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공주 일행을 뒤 따라 온 보름달이 중천에 떠서 하얗게 웃으며 두 사람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먼저 방으로 들자고 말하지 못하고 정원을 오락가락하며 서로가 먼저 방으로 들자는 말을 할 때까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보살님,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청년이 살며시 공주의 손을 잡았다. 공주는 한쪽 손을 청년에게 맡긴 채 땅만 바라보았다.

"밤이슬이 차갑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세요. 어차피 한 평생 부부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면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

"보살님,......"

공주는 청년이 이끄는 대로 대청으로 올라섰다. 건넌방에 마련 된 목욕물에 공주가 먼저 일을 마치고 이어 청년도 목욕을 하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동시에 방으로 들었을 때 두 사람은 동시에 외마디 소리를 냈다.

아-

커다란 방안에는 여덟폭 병풍이 쳐있고 그 가운데 초례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화려한 당의(唐衣)와 족두리가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곁에는 신랑을 위한 사모관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초례청 옆 교자상에는 화려하고 푸짐하게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상 곁에는 술 주전자가 있었다. 방 아랫목에는 비단금침이 깔려진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살님, 오늘 밤 우리는 부부로서 예를 꼭 치러야 하나 봅니다."

청년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방님, 천생연분이라면……."

초례상 위에 촛불이 켜져 있고 기러기 한 쌍과 백미 두 그릇 송죽화병 한 쌍이 단출하게 올려져 있고, 상 끄트머리에 흰 봉투가 있었다. 청년이 봉투를 열어보니 혼례식 절차가 적혀있었다. 치밀하고 정갈한 혼례준비였다.

청년은 속으로 주지 스님에게 고마워하며 부인이 될 공주를 쳐다보았다. 공주와 청년은 서로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대례복으로 갈아입었다. 청년이 공주의 머리에 족두리를 얹어주자 공주는 조용히 흐느꼈다. 두 사람은 세숫대야에 손을 씻고 청년이 동쪽에 서고 공주가 서편에 섰다.

"자, 여기 서찰에 적힌 전안례(前雁禮)를 올리겠습니다. "

청년이 기러기 한 쌍을 공주에게 주자 공주는 기러기를 초례상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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