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운우지정(雲雨之情)

"자, 이번에는 교배례(交配禮) 순서입니다. 순서에 따라 진행합시다."

"네에, 서방님."

먼저 공주가 청년에게 두 번 절하고 나자 청년은 공주의 절을 받고 공주에게 한번 절을 하였다. 서로에게 절을 하며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주는 울고 있었다. 아버지인 상감 수양과 어머니 정희왕후의 그윽하고 자애로운 보살핌과 왕실 어른들의 축복을 받으며 화려하게 혼례식을 치러야 할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폐서인 되어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갑작스럽게 혼례를 올려야하는 자신의 처지가 슬프고도 가슴 아팠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앞에 서서 자신에게 절을 하는 남자가 가엾고 안타까웠다. 청년 역시 울고 있었다. 가족과 친인척 모두가 대역 죄인으로 몰려 참수를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진 마당에 심심산골에 근본도 잘 알지 못하는 여인과 혼례를 올리는 자신이 한심도 하였지만 일가친척 한 사람 없는 것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번에는 합근례(合巹禮) 순서입니다. "

공주가 공손히 술을 잔에 따라 청년에게 건넸다.

"서방님, 술잔을 받으세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의미의 술잔이었다. 신랑이 신부가 따른 술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신랑이 술을 잔에 가득 따라 신부에게 건넸다. 신부의 손이 파르르 떨리면서 간신히 술잔을 받았다.

이번에는 신부가 표주박에 술을 가득 따라 신랑에게 건넸다. 부부의 백년해로를 의미하는 술잔이다. 신랑이 단숨에 표주박에 담긴 술을 비우고 다시 표주박에 술을 채워 신부에게 건넸다. 이번에도 신부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비록 각자가 사고무친의 홀몸으로 혼례를 치렀으나, 나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그대를 버리지 않고 은애하고 또 은애하리다."

"으흐흐흐 흐흑……."

신부는 신랑의 이야기에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통곡하는 신부의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행랑채에서 살며시 나와 방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몰래 숨죽이며 지켜보던 유모는 가슴이 미어졌다. 공주는 주저앉아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서러움을 송알송알 토해냈다.

"그만 우세요. 오늘 같이 기쁘고 좋은 날 울면 어떻게 하오. 울지마세요."

신랑이 신부를 살며시 안아 주자 신부는 신랑의 품에 안겨 한참동안 눈물을 쏟았다.

"자 이제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 합환주를 듭시다. 우리는 오늘 천지신명의 명에 따라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이오. 이제는 절대로 그대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오."

신랑이 신부를 다독여 단출하게 준비된 교자상 앞에 앉게 했다. 이번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신부에게 신랑이 먼저 주전자를 들어 술잔을 따랐다.

"자, 먼저 드시고 한잔 주세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신부가 술잔 반을 비우고 다시 신랑에게 술을 따랐다.

"고맙소. 우리가 진정으로 부부가 되었구려. 평생 그대만을 은애하고 해로동혈하도록 내 모든 정성을 쏟겠소이다. 나를 믿고 따라 주시겠소?"

"고맙습니다. 서방님, 바늘이 가는 데 당연히 실이 가야지요. 앞으로 소녀, 서방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따르겠나이다."

"고맙구려. 정말 고맙구려."

은근히 오고가는 술 잔속에 두 젊은 청춘의 정이 진하게 녹아있었다. 신랑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있었다. 신부 역시 생전 처음 마셔보는 술에 취기가 올라 현기증이 일었다. 신랑이 신부를 곁에 오게 하여 다시 손수 술 한 잔 따라 주었다. 비록 처음 마시는 술이지만 신부는 점점 술이 꿀물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방님, 밤이 이슥합니다. 자정이 넘기 전에……."

"그렇지. 자정이 넘기 전에……."

‘아아, 그러나 어찌 해야 하나? 어떻게 초야를 치러야 하는지 이럴 때 어머님이 계셨다면 자세히 알려 주실 텐데......’

공주는 초야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남자와 한 이불을 덮어야 한다는 것이 무척 부담이 되었다. 공주가 주저하자 신랑이 된 청년은 신부를 살며시 안아 비단금침이 깔려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촛불이 너울거리며 제 마음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마다 신랑 신부의 모습이 벽에 그림자로 그려져 흔들렸다.

"자아, 이제 잠자리에 듭시다. 밤이 꽤 깊은 듯 합니다."

신랑이 신부의 족두리를 내리고 당의를 벗겨주었다. 신부가 일어나 스스로 치마와 저고리를 벗었다. 얇은 속옷 사이로 백설보다 하얀 신부의 속살이 비쳤다. 신랑은 신부의 눈부신 모습에 잠시 동안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신부가 비단이불 속으로 자리를 잡고 눕자 신랑도 의관을 벗어 곱게 정리하고 황촛불을 껐다.

이미 여인을 알고 있는 청년은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공주의 입술을 더듬으면서 한 손은 공주의 머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은 공주의 은밀한 부위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남성을 생전 처음 받아들이는 공주는 떨리면서도 약간의 호기심이 일었다. 생각보다 보드라운 청년의 입술과 손길이 공주를 안심시키며 서서히 열락으로 몰고 갔다.

방안에서 여인의 가냘픈 신음이 긴 여운을 남기며 오랫동안 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밖에서 방안의 모습을 숨죽이며 훔쳐보던 유모가 몸을 뒤틀며 살며시 빠져나와 행랑채로 향하고 보름달은 더욱 정기를 내뿜으며 서녘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신랑 신부의 심신이 합일(合一)되었을 때 북두칠성의 제1성인 탐랑성이 밝게 빛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북극이 여명이 시작된 것처럼 환해졌다. 탐랑성이 강한 빛을 내자 제7성인 파군성이 정기를 잃으면서 하얗게 변색되다 시피했다. 파군성의 급살(急煞)의 기가 쇠해져서 암기(暗氣)를 불러오지 못했다. 탐랑성으로 인하여 북극의 밤하늘이 서서히 보랏빛 상서로운 기운을 발하자 뭇별들은 일제히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화기(和氣)를 뿜어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서방님, 생시입니다. 이건 분명히 생시에요.”

“그런 것 같군요. 이승에서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내 그대를 한시라도 잊지 않고 은애하리다. 고맙소.”

“서방니임 - ”

신랑의 뜨거운 혀가 다시 한 번 공주의 달콤한 입 안을 휘젓자 공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신랑의 두 손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신부의 젖가슴과 둔부를 지분거리면서 신랑은 뜨거운 입김을 신부의 귀속으로 불어 넣었다. 공주는 뜨거운 불덩이를 끌어안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深淵)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신랑이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질주(疾走)하자 하나의 불덩이가 두개로 분리되었고 두개의 불덩이는 다시 수백 수천의 작은 불덩이로 쪼개지면서 천지를 서서히 태웠다.

길고 끈적한 신부의 비음(鼻音)이 길게 이어지고 이에 맞춰 신랑의 거친 숨소리가 방문을 넘어 대청마루로 흘러나왔다. 달이 부끄러운 듯 구름 속으로 숨더니 숲속에서 이름 모를 산새들이 일제히 울어댔다. 수백 수천의 반딧불이 들이 모두 하늘로 치솟더니 신방(新房)이 있는 지붕위로 올라 쌍쌍이 원을 그리며 거대한 군무를 추었다.

그 군무가 너무나 황홀해 마치 꿈속의 모습 같았다. 신랑 신부의 첫날밤은 길면서도 달콤했다. 태어나서 처음 맞는 남성이지만 마치 수십 년을 산 부부처럼 두 사람은 화기애애했다. 긴 애무에 이어 신랑의 그것이 불덩이를 토해냈다. 북극의 하늘이 순간 번쩍하더니 번개가 일었다. 구름 속에 있던 달이 환하게 웃으며 뽀얀 달빛을 쏟아 내 신방의 창문을 하얗게 물들였다.

"아기씨, 저기서 좀 쉬었다 가면 안돼요? 쇤네 다리아파 죽겠어요.”

동이 트기 전 사내는 공주와 유모를 깨워 초야(初夜)를 치룬 집을 떠나 무작정 동쪽을 향해 걸었다. 쉬지 않고 걷던 일행은 뒤쳐진 유모의 투정을 듣고 자신들의 다리도 아프다는 것을 느꼈다. 행여 누가 자신들의 뒤를 밟지나 않나 사내는 자주 뒤를 돌아보았지만 희뿌연 안개 속 산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멀리 계룡산 봉우리들이 안개 속에 어렴풋하게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치러진 초야의 긴장과 황홀함에 공주는 아직도 자신이 비단금침 위에 누워있는 듯 한 착각에 빠져있었다. 간밤에 길고 긴 운우(雲雨)에 숙면(熟眠)을 취하지 못해 걷는 동안에도 비몽사몽(非夢似夢)간이었지만 공주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된 채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공주는 꿈결처럼 지나간 간밤의 일이 자꾸 뇌리에서 맴돌았다. 생전 처음 맞은 사내였지만 공주는 생각보다 사내의 몸이 솜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받았다. 초야에 대한 두려움은 잠시였다. 공주의 신음소리에 두 사람은 열락의 깊은 수렁에 빠졌다 다시 나오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부지불식간에 환희를 맛 볼 수 있었다.

공주는 간밤의 일이 자꾸 생각나 얼굴이 자꾸만 화끈거렸다. 마치 한양에 있는 부모형제들이 자신이 남몰래 치른 초야를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체의 은밀한 부위에서 느껴지는 뻐근함과 미약한 통증이 자신이 진정한 여자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서방님, 저기서 잠시 쉬었다 가요.”

공주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초막처럼 보이는 허술한 집을 가리켰다.

“그래요. 힘드시죠?”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맺힌 사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공주를 바라보았다. 간밤에 힘든 일을 치르고도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공주가 가엾기도 하고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서너 식경 다리품을 팔자 시장기를 느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허술한 초막 안으로 세 사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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