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부마(駙馬)가 되다

“서방님, 저기 정자에서 잠시 쉬면서 편지를 읽어보세요. 소첩, 그 편지 속에 무슨 내용이 씌어져 있는지 몹시 궁금하옵니다.”

“그렇게 합시다.”

편지의 주인이 먼저 읽어봐야 할 것을 이미 다른 사람이 읽어 버렸으니 천기가 누설 된 것 같았다. 사내가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세희는 보아라. 주지스님으로부터 네가 김가성을 가진 청년과 천생연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그분을 하늘이 네게 점지해준 분으로 알고 신명을 다바쳐 지아비로 모시고 평생을 잘 살도록 해라. 이 어미는 네가 어디로 가서 살던지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았으면 한다.
스님에게 너의 혼사에 관한 모든 것을 위임했으니 주지스님이 날짜를 잡아주면 주지스님의 지시에 따르도록 하여라. 혼인이란 두 집안이 인연을 맺는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일이지만 지금의 상황이 너에게 큰 기쁨을 주지 못하는구나. 어미로서 너희 부부의 혼사를 직접 챙겨주지 못한 내 죄를 두고두고 부처님 전에 속죄할 것이다.
주지스님은 너희 부부는 서쪽보다 동쪽에 터전을 잡고 살아야 기(氣)가 성하고 부부로서 오래오래 복락을 누릴 것이고 하셨다. 그러니 초야를 치루면 즉시 동쪽으로 떠나가서 너희 두 사람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장소가 나오면 터를 잡고 살도록 하여라. 호패는 너희가 평생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버지 생각은 아예 잊었으면 좋겠구나. 먼 훗날 세상이 좋아지면 이 어미는 네가 보고 싶어 혹여 너를 찾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무튼 지아비를 잘 보필하여 한 세상 편히 살도록 하여라.

사위보세요. 나는 조선의 국모(國母)입니다. 장모로서 혼인식에 직접 찾아보지 못해 송구합니다. 내 딸 세희공주와 숙연(宿緣)이란 이야기를 동학사 주지스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이제 공주란 직분에서 여염집 여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문과 어떠한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모든 일들은 잊으시고 이제는 한 여인을 인애하고 평생을 서로 의지하면서 평안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두 사람의 신분을 속세의 사람들에게 밝히지 마세요. 상감의 자비가 있기 전에는 두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두 사람의 행복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세요. 세상에 믿을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것을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로 다른 가문에서 자란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먼 훗날 상감의 마음이 누그러지면 내 두 사람을 반드시 찾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세희공주와 함께 읽어보시고 다 보시면 불태워 없애버리셔야 합니다. 부디 두 사람 몸 건강하고 오래오래 좋은 연으로 맺어지시길 바랍니다.

중전 윤씨의 수결(手決)이 찍힌 편지였다. 사내는 편지를 읽는 동안 정신이 몽롱하고 자신이 지금 어떤 거대한 음모의 늪에 서서히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편지를 다 읽은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인인 공주에게 절을 하려고 하였다.

“공주마마, 소인, 그동안의 불경을 용서하소서.”

“서방님,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어서 앉으소서.”

“공주마마, 소인의 죄를 용서하세요. 소인의 절을 받으소서.”

“서방님, 아니 되옵니다. 어서 앉으세요.”

편지 한 장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하였다. 사내는 처음부터 자신의 아내가 된 여인이 보통의 신분이 아닐 것이란 추측은 했지만 조선국의 공주일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공주이면 상감의 여식이고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를 척살한 장본인의 딸이었다. 사내는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제 자신과 혼인한 여인이 조선의 공주 신분이기에 공주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청년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 손을 잡고 경복궁에 자주 놀러간 적이 있었다. 궁궐에 놀러갈 때마다 어린 소년은 또래의 왕자와 공주들과 스스럼없이 뛰어 놀곤 했었다. 할아버지의 권세는 어린 왕을 넘어 조선 최고의 실력자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해서 감히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 등 세종의 아들들도 대적할 수 없었다. 그때 소년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공주를 보고 먼 훗날 공주들에게 장가들겠다고 다짐했었다.

‘아아, 무서운 일이로다. 나의 어린 시절 꿈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양가의 부모님이 참관한 가운데 형제자매들과 인가친척의 인정을 받지 못한 혼인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정말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도다. 내 어린 시절 집념이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루어지다니, 정말로 무섭고도 기이한 일이로다.’

어린 소년이 대궐에 놀러가 공주들과 격의 없이 어울릴 때 공주들과 옹주들은 서로 소년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암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때 세희공주는 대궐 밖 수양대군의 잠저(潛邸)에 있을 당시여서 소년과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소년이 훗날 공주들과 혼인하겠다는 다짐은 이루어 졌지만 왕의 사위 즉, 부마(駙馬)로서 남들이 우러러 보는 행복하고 앞날이 보장되는 자리가 아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잠행을 해야 하는 딱한 처지였다.

‘아, 이럴 수가 철천지원수의 딸과 부부의 연을 맺다니, 먼 훗날 저승에 들면 조상님들을 어떻게 뵐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혼인이 모두 어마마마의 의도였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어마마마의 뜻이란 말이더냐?’

정자에 오른 두 사람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내는 자신의 철천지원수를 갚기도 전에 원수의 딸과 혼인을 한 사실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주지스님 말대로 삼세의 숙연인 공주와의 기묘한 인연에 치를 떨었다.

‘아아,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 꼬였단 말이더냐? 원수의 딸과 몸을 섞고 어떻게 조상님들을 뵐 수 있단 말인가?’

공주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흐느끼는 사내의 손을 살며시 잡고 자신의 뺨에 대었다. 사내의 손에 묻은 눈물이 공주의 뺨에도 전해졌다. 사내는 공주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하지 않았다. 한동안 서서 흐느끼는 사내를 안아주던 공주는 사내를 정자에 좌정토록 하였다.

“서방님, 절 받으세요. 그동안 소첩이 본의 아니게 서방님을 속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아바마마께 그간의 올바르지 못한 정사(政事)를 말씀드렸다가 아바마마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아버님의 분노는 소첩의 목숨을 요구하였습니다. 어마마마의 도움으로 간신히 한양성을 빠져나와 동학사에 몸을 숨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우연히 서방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모든 것이 주지스님 말씀대로 서방님과의 선연(善緣)이 있어 오늘 같이 부부의 연이 닿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조선국의 공주가 아닌 여염집아낙으로 서방님을 평생 모시고 살겠습니다. 그간의 소첩의 행동을 용서하세요.”

“아닙니다. 상감마마의 피를 받은 조선국의 공주마마이십니다. 소신이 어찌 공주마마의 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서방님, 소첩 이미 조선국의 공주가 아닙니다. 서방님의 여인입니다. 앞으로는 공주라는 말씀은 입에 담지마소서. 부탁드립니다. 서방님, 소첩 이제부터 서방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려 합니다. 부디 소첩의 뜻을 버리지 마세요.”

사내는 자신의 할아비와 아비가 상감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끝내 참았다. 자신만 아픔을 간직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착한 공주에게 까지 자신의 아픔을 함께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할 것 같았다.

‘그래, 죽는 그날 까지 공주에게는 절대로 내 조상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말자.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하여 좋을 것이야.’

“서방님, 이제 소첩에 대한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소첩 또한 서방님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사옵니다.”

“공주마마, 마마께서는 그냥 예전처럼 소신을 대하듯 해주세요. 소신은 한양에서 나고 자랐으며,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습니다만, 공부에 뜻이 없어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있을 뿐입니다. 소신은 이대로 그냥 한 세월 금수강산에 파 묻혀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러하오니, 소신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묻지 마소서. 지아비와 지어미로서 서로의 등을 다독거리며 살고 싶습니다. 만약 먼 훗날 공주마마께서 대궐이 그리우시면 가셔도 좋습니다. 소신, 기꺼이 보내 드리겠사옵니다.”

“아니옵니다. 서방님. 소첩, 공주가 아니옵니다. 단지 여염집의 아낙일 뿐이며, 오로지 서방님 한분을 믿고 따르는 여인일 뿐이옵니다. 소첩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방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발 소첩을 믿어 주세요.”

공주가 흐느끼면서 사내에게 애걸을 하자 사내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비록 공주이지만 상감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공주가 가엾고 측은했다.

“고맙소. 죽음이 갈라놓는 그 순간 까지 부인을 은애하리다.”

“서방님, 으흐흐흐흐…….”

편지 한 장에 그간의 오리무중 같던 두 사람 사이의 답답함이 공주에게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사내의 가슴을 천근의 바위가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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