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효

김춘추는 김유신이 자신의 뜻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일었다. 지금까지 고구려, 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치루면서 한 번도 두 사람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소신은 유구무언으로 있으며, 폐하를 돕겠습니다. 메추리가 어찌 대붕(大鵬)의 깊은 속내를 알겠습니까?”

“경은 구만리 창천을 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폐하, 보희부인과 문명왕후 드셨습니다.”

밖에서 내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마침 대총관의 두 여동생들이 들었습니다.”

“내관은 어서 두 분 왕후들을 안으로 뫼시어라.”

김춘추의 얼굴에 희색인 돌았다. 두 왕후 모두 절색(絶色)으로 김춘추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자매 사이라서 서로에 대한 질투나 시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서로 돕고 보살펴 주는 사이였다.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인 문명왕후와 김춘추 사이에는 태자 김법민, 왕자 김인문 등 6남 1녀를 두었고, 김유신의 첫째 여동생이며 김춘추의 세 번째 부인인 보희부인 사이에는 왕자 김개지문과 요석공주 등 2남 1녀를 두고 있었다.

“폐하와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보희, 문희 두 왕비가 김춘추와 김유신을 향해 반절로 정중하게 예의를 표했다. 흰색과 붉은색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왕비 옷이 잘 어울리는 보희부인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한 송이 백합 같았다. 보희부인 큰머리에 꽂은 보관(寶冠)에 장식된 오색 구슬들이 바르르 떨면서 소리를 냈다.

녹색 당의와 붉은 치마로 치장한 문명왕후 문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김유신 옆에 앉고 보희부인은 김춘추 곁에 앉았다. 원숙한 여인들에게서 향긋한 냄새가 풍기면서 대전은 금방 사내의 욕망을 자극하는 그윽한 방향으로 가득했다.

“잘 오시었소. 대총관과 한창 담소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폐하, 저희들도 오랜만에 오라버니가 드셨다는 소식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보희부인이 김춘추의 빈 잔에 감로주(甘露酒)를 따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요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얼굴이 예전보다 많이 상한 듯 싶습니다.”

“아닙니다. 고민이라니요?”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문명왕후는 백옥보다 흰 손으로 술병을 들었다. 두 여동생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김유신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남매가 한데 모이는 자리가 되었다. 김유신의 강력한 권유에 두 여동생들이 모두 한 지아비 김춘추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두 왕비들은 오라비 김유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받들었다.

“왕비들께서 마침 잘 오셨습니다. 남정네들끼리 술잔을 기우리려니 흥이 나질 않습니다.”

김춘추는 보희와 문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큰 언니인 보희는 수줍음이 많아 늘 동생인 문희에게 발언권을 양보하는 편이었다.

그런 성정으로 말미암아 문희가 먼저 왕비의 자리까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나중에 오라비 김유신 천거로 겨우 김춘추의 세 번째 왕비가 될 수 있었다. 보희는 담장 밑에 수줍게 피어있는 백합이라면 문희는 오뉴월의 장미라고 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두 자매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공식적인 행사에는 두 왕비를 대동하였는데 대우도 동등하게 해주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두 왕비와 10명이 넘는 왕자와 공주들을 대동하고 김춘추가 월성을 나와 황룡사나 안압지로 나들이할 때 광경은 서라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큰 구경거리였다.

“폐하, 오라버니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소첩들이 방해를 한 게 아닌지요?”

보희부인이 술병을 들어 김춘추의 술잔에 다시 감로주 한잔을 따랐다.

“대총관과 요즘 항간에 나돌고 있는 원효의 이상한 노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소첩들도 그 노래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효스님은 고승대덕임을 자처하면서 어떻게 그런 요사스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분이 정신이 반쯤 나간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문명왕후 문희가 불쾌한 얼굴빛을 하였다.

“경이 원효스님에 대하여 소개를 한번 해주시구려.”

문명왕후가 원효에 대하여 언짢아하자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눈을 찡끗하였다.

“소신이 간단하게 원효스님에 대하여 소개를 올리겠습니다.”

스님의 법명은 원효(元曉), 법호는 화정(和靜), 속성은 설씨(薛氏)이며 초명은 서당(誓幢)이다.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押梁郡佛地村)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10세에 출가하였는데 남달리 총명하여 출가 때부터 스승을 따라 경전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불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 스님은 경학뿐만 아니라 유학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다.

부친 담날(談捺)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의 하급관리인 내마(奈麻)였고, 조부는 잉피(仍皮) 또는 적대(赤大)라는 사람이다. 잉피는 제7세 풍월주를 역임한 설원랑(薛原郞)의 둘째 아들이다. 설담날은 629년 8월 진평왕의 명령으로 풍월주 출신인 김용춘(金龍春)과 김서현(金舒玄)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칠 때 출전했다가 전사했다.

원효의 아명은 서당(誓幢) 혹은 신당(新幢)이다. 그는 뒷날 자신이 태어난 마을인 밤골을 따서 아호를 율곡(栗谷)이라고 했고, 출가해서는 밝은 새벽을 뜻하는 원효를 법명으로 삼았다. 원효의 모친이 유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으며, 그때 만삭이었던 그의 모친은 남편을 따라 어딘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부부가 밤골에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산기(産氣)가 일어나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황급히 웃옷을 벗어 나무에 걸고 주위를 가린 뒤 자리를 잡아주었다.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불렀다.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주위를 덮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먼동이 터오는 새벽에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원효였다.

스님은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에 주석하고 계신 보덕화상의 강하(講下)에서 열반경, 유마경 등을 수학하였다. 영취산 혁목암(靈鷲山赫木庵)의 낭지화상에게서도 사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신승(神僧) 혜공화상에게서도 사사하였다.

스님은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법사와 규기 화상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옥에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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