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희부인
영창부인 김보희의 소생들은 정비인 이모 문희에게서 출생한 왕자나 공주들에 비해 신라왕실에서 차지하는 권세가 미미하였다. 김춘추는 그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비와 후궁 사이의 문제인지라 모르는 척 하였다. 보희부인 소생의 자식들은 김춘추를 이어 보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을 한탄하며 술과 가무 등 풍류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전장에서 지아비를 잃고 길고 긴 겨울밤을 혼자 지내야 하는 누이동생 요석공주를 위로하기 위하여 이날 밤에도 보희부인의 소생 두 전군들이 요석궁에 모여 가무를 즐기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김춘추는 자식들의 방탕한 생활을 잘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두 전군들이 야심한 시각에 누이동생 처소에서 이 무슨 일이더란 말이냐? 이 어미만 빼놓고 너희들만 유흥을 즐기니 섭섭한 생각이 드는구나.”

보희부인은 정말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지아비와 오라비와 어울려 주연을 즐기다 온 관계로 보희부인도 두 볼이 발가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어머님을 모시려고 시자(侍子)를 보냈으나 어머님이 아버님과 외삼촌 그리고 이모님과 대전에서 주연을 열고 있다고 하시기에 저희들만 모였습니다. 누이동생이 요즘 들어 너무 울적해 하는 것 같아 오라비들이 잠시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장남 김개지문이 불콰한 얼굴로 모후에게 고하였다.

“너희들이 함께 모여 유흥을 즐기는 자체에 대하여 이 어미는 조금도 나무랄 생각이 없다. 마침, 다들 한자리에 있으니 참으로 잘되었구나. 이 어미가 너희들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단다.”

늘 엄격한 모습의 어머니 보희부인을 보아온 남매들은 어머니의 의외의 반응에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다.

“어머니, 다과를 올릴까요?”

“입안이 깔깔하구나.”

요석공주가 보희부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보희부인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요석공주는 시녀들에게 눈짓을 하였다.

“어머니, 이 늦은 시각에 요석궁을 찾으신 것을 보니 요석공주에게 급히 전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네요. 급히 전할 것이 무엇인지요?”

눈치 빠른 둘째 아들 김지원이 모후의 안색을 살폈다.

“어머니, 감주와 과자를 준비하였습니다.”

요석공주가 잔에 감주를 따라 보희부인에게 올렸다.

“너희들은 이 어미의 친 자식들이란다. 너희 이모의 자식들과는 태생이 다르다. 이 어미의 바람은 너희들이 문명왕후의 소생들과 달리 궁에서 조용히 살면서 인생을 즐기면 되는 것이니라. 이모는 욕심이 많아 법민(法敏)을 부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많은 정성과 노력을 하고 있다.”

보희부인은 김춘추의 뜻을 잘 알기에 자신의 몸에서 출생한 자식들의 입신양명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칫 동생 문명왕후의 견제를 받을까 조심하였다.

“어머님, 저희들도 다 같은 아버님의 자식입니다. 이모님의 자식들은 조정의 일에 깊이 관여하며 부왕의 국사(國事)를 돕는데 저희들은 음지에 앉아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답답하답니다. 저희 형제가 아무리 *전군(殿君)이라 하지만 아버님께서 저희를 너무 홀대 하십니다.”

지원 왕자가 울분을 토하듯 언성을 높이자 보희부인은 순간 창밖을 흘깃 주시하더니 검지를 입에 댔다.

“요석공주는 지금부터 이 어미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어미의 말은 곧 부왕(父王)의 말씀이시다. 다만 이 어미가 아버님의 의중을 전할 뿐이다.”

“어머님, 무슨 말씀이신데요?”

정신이 약간 든 듯 요석공주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보희부인이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해 하였다.

“어머니, 부왕께서 금은보화라도 선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왕자 김개지문 왕자가 엉뚱한 말을 하였다.

“그렇구나. 부왕께서 네 누이동생에게 아주 큰 선물을 하시겠다고 하시는구나. 그러니 공주와 너희 형제들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야.”

부왕 김춘추의 큰 선물이라는 보희부인의 말에 남매는 취중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 했다.

“어머니, 부왕께서 소녀에게 큰 선물을 하신다니요? 제가 얼른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부왕께서는 소녀의 지아비가 조천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뒤로 소녀에게 가끔 금주(錦酒)나 가효(佳肴)를 시녀들 편에 보내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개지문 오라버니 말씀처럼 소녀에게 금은보화라도 보내주시려나 봅니다?”

요석공주는 궁성 밖에서 거주하다가 지아비 김흠운이 전장에서 전사하자 김춘추는 요석공주를 왕궁에 거주토록 하였다.

“부왕께서 공주를 원효스님에게 하가하도록 하시겠단다. 이 결정은 이 어미의 친정 오라버니인 김유신 대총관과 상의하여 내리신 결정이란다.”

“네에? 아니 어머니, 그게 말이 됩니까? 신라 제일의 미색인 누이동생을 땡중에게 시집을 보내시겠다니요? 어디 동생을 시집보낼 데가 없어서 하필이면 중이랍니까? 조천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매부 김흠운의 집안에서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동생에게는 나이어린 두 여식이 있습니다. 예전 매부와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리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소자는 도저히 부왕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부왕과 외삼촌에게 말씀드려 동생이 원효에게 하가하는 것을 막아주세요.”

김지원은 가슴을 두드리며 통탄하였다.

“어머님, 아버님이 점점 기력이 약해지시더니 이제는 허언(虛言)까지 하시는 상태가 되셨나 봅니다. 원효는 누이동생보다 한참 나이도 많고 요즘에는 기행을 밥 먹듯 하며 서라벌을 휘젓고 다닌다는데, 부왕과 대총관은 어째서 그런 중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누이를 하가토록 하신 답니까? 조국의 안위를 위하여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매부의 원혼이 지하에서 통탄할 것입니다. 어머님께서 아버님께 간곡히 말씀드려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두 전군들은 보희부인의 말에 한마디씩 내뱉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요석공주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 개속
*전군(殿君) - 정비(正妃)의 자식이 아닌 후궁(後宮)의 자식이거나 정비가 왕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통(私通)하여 낳은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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