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색즉시공공즉시색

삼천대천의 모든 삼라만상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라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익어가고 있다. 사람의 심성 역시 생각과 모양이 불분명하여 볼 수 없지만 운명이 있어 서로 작용하고 있지 않는가. 삼세의 인연들 또한 시공(時空)의 파장으로 전생의 일과 생각했던 일은 현생에도 하게 되고 금생에 하던 일은 내생으로 연장하여 다시 생각게 된다.

인연을 따라 생겨나고 인연을 따라 사라지는 종연생종연멸은 만고의 법칙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이상은 삼세(三世)의 윤회는 존재하는 것이다. 윤회는 인(因), 연(緣), 업(業), 과(果)의 넷으로 구성되어 있는 필연적인 연기(緣起)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연업과(因緣業果)에서 ‘인’은 씨앗이고 ‘연’은 씨앗이 뿌려지는 밭이며, ‘업’은 씨앗이 튼실한 결실을 볼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가꾸는 행위이다. 이와 같이 인과 연과 업이 합해지면 결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자가 좋고 밭이 좋아 농사를 잘 지었다면 풍년이 될 것이고, 종자가 좋지 않고 밭 역시 좋지 않고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면 결실이 안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고 받을 것이니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가 바로 염부주(閻浮州) 인간 세계의 진리이다. 어떻게 하면 업과 윤회의 돌고 도는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방법은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수행하기 따라 벗어날 수도 있고, 눈앞의 현상만을 보고 살아간다면 육도(六道)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자재보살.”

“나무미륵불.”

인간사에서 아주 좋은 인연이란, 움켜쥔 인연 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각박한 인연보다 넉넉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내가 기다리는 인연보다 찾아가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의심하는 인연보다 믿고 의지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눈치를 주는 쌀쌀한 인연보다 감싸고 보듬어 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슬픔을 안겨 주는 인연보다 기쁨을 선사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타인을 시기 하는 인연보다 손뼉을 쳐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비난하는 인연보다 칭찬을 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무시하는 인연보다 존중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원망하는 인연보다 감사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흩어지는 인연보다 하나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변덕스러운 인연보다 한결같이 변함이 없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타인을 속이는 인연보다 솔직한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부끄러운 인연보다 떳떳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해(害)가 되는 인연보다 복이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짐이 되는 인연보다 힘이 되어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씨앗을 주면 그 씨앗으로 꽃을 피우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원효스님의 인연에 대한 심오한 법문이 잠시 일단락되었다.

잠이 덜 깬 듯 앉아 있던 두 왕자들의 두 눈동자에 광채가 번뜩거렸다. 원효스님 법문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속에 비수처럼 박혀들었다. 보희부인과 요석공주의 두뺨으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스님,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스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나무광세음보살. 스님 고맙습니다.”

“나무미륵불. 스님,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보희부인을 비롯한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원효스님께 절을 올렸다.

“나무석가모니불. 소승의 어려운 법문을 이해하신 듯 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문제 중에서 남녀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이 가장 골치가 아프답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 보면 아주 간단하답니다. 지금 소승의 앞에 앉아 있는 두 분은 먼 과거세에 소승의 어머니였거나 소승의 부인이었거나 혹은 소승의 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두 왕자님 역시 먼 과거세에 소승의 아버지거나 소승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왕후님과 요석공주께서 먼 과거세에 두 분 왕자님들의 부인이었거나 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인연 특히 남녀의 관계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법당 안에 소승을 포함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다섯 사람의 위로 열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한 뿌리와 닿습니다.

우리 다섯 사람은 과거와 미래세에 연관이 있기에 지금 이 시각에 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광대한 삼천대천(三千大天)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오로지 찰라(刹那)만 있습니다. 찰나의 연속으로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하고 잠시 순간이 지나면 과거라 하고 곧 이어질 순간의 연속성이 미래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우리 인간들의 척도로 분리해 놓은 허망한 단위에 불과합니다.

삼천대천에는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다섯 사람은 곧 사라질 환영(幻影)에 불과합니다.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은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며,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으로 이해합니다.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습니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닙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색과 공을 차별적인 개념이 아닌 일의(一義)로 관조해야 합니다. 색과 공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색이 변괴(變壞)되어서 공을 이루는 현상적인 고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여자라고 깨닫는 순간 상대적으로 남자가 있다는 것을 동시에 알게 됩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여자가 없으면 남자도 없는 것입니다. 남녀관계는 물과 불의 관계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물이 있어야 불이 나오고 불이 있어야 물이 생겨납니다.

왕후께서도 지금의 지존을 만나 왕자와 공주를 출산하셨습니다. 공주님께서는 김흠운 장군을 만나 두 따님을 두셨고요. 왕후께서는 지존 한분으로 만족한 인생이 되셨습니다만 공주님에게는 하늘이 정해준 한 번의 인연이 더 남아 있습니다. 그 인연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