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청실홍실

그 인연을 멀리하게 되면 이는 나라와 가문에 크게 욕이 되는 것이니 그 인연을 반드시 성사시키셔야 합니다. 좋은 인연은 자주 오는 게 아닙니다. 보통 사람에게 좋은 인연은 두세 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를 몰라 그냥 흘려보내기 일쑤랍니다. 금생에 좋은 인연을 한번 맺기 위해서는 과거로 천세(千世), 내세(來世)로 또한 천세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과거세에도 미래세에도 아닌 바로 금세(今世)에 공주님의 호연(好緣)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에?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 금세에요?”

요석 공주는 금세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아, 스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몰가부(沒柯斧)란 노래를 지어 서라벌에 퍼트렸구나.’

보희부인 역시 요석공주가 금세에 또 다른 인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원효스님의 말에 마음이 심란하였다. 자신이 아들, 딸을 대동하고 아침 일찍 분황사를 찾은 이유를 미리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이 언젠가 생각했던 것은 물질세계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 생각이 착하든 그렇지 않든 생전에 어떤 형태로 든 현상계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내가 타인을 탓하는 심성을 지니면 나 역시 타인에게 질타 받는 위치에 있게 되며, 고집이 센 경우에는 병이 생기기도 한다. 주위의 현상과 환경은 본인 마음의 구체화이니 불행한 일이 생기면 어떤 마음을 고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참회해야 한다. 나쁜 마음을 버리면 그 불행은 사라지게 된다. 인연과 심체(心體)의 구상화는 무슨 연관이 있나.

인(因)은 생각 즉, 염(念)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자꾸만 동심(同心)이 일어나면 심신에 각이 그려진다. 원인이 생겨났다고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연(緣)은 반드시 어떤 계기가 있어야 일어난다. 어떤 계기가 시간과 공간 구도 속에서 걸리고 그 결과 현상이 곧 상념의 업(業)이 된다.

한 밥상에서 밥을 먹었는데도 어떤 이는 소화가 안 되고 어떤 이는 멀쩡하다. 이유는 동일한 연(緣)에 닿아도 각자 인자(因子)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름 난 의사의 처방은 인연을 제거하는 방법이지만 절대로 인을 제거하지 못한다. 근본을 다스리는 것 보다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인을 제거할 때 병이 사라진다.

인간 사회는 이웃과 옷깃을 스칠 수밖에 없다. 옷깃이 한번 스치는 데 5백 겁(劫)의 인연이 요구된다. 한 겁은 가로와 세로가 80리, 높이가 20리 되는 크기 바위에 선녀가 천년마다 한 번씩 지상에 내려 왔다가 올라갈 때 스치는 옷깃에 바위가 모두 닳아서 사라지는 세월을 말한다.

또한 겁은 어떤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말하는데 하늘과 땅이 한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겁이란 세월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의 장구한 시간이란 뜻이다. 저승에서 5백겁을 같이한 사람들이 이승에서 옷깃 한 번 스칠 인연이 된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인연 인가? 비록 옷깃만 스치고 지나칠지라도 그 이전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리는가. 그런 것을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현생에서 부부가 되려면 7천 겁의 인연이 지속되야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은 사람도 있고 싫은 사람도 있다.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때로 싸우기도 한다. 사람이 군집 사회생활을 하는 대상이에 이 같은 현상을 피할 수 없다.

사람 누구든 이유도 없이 누구를 좋아한 적이 있을 테고 까닭도 없이 증오한 때도 있다. 누구를 좋아하는 만큼 그 역시 사랑받았을 테고 누굴 증오하는 만큼 미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부인께서 직접 원효스님을 만나 스님의 속내를 파악하셨다고요?”

“폐하, 소첩이 두 전군과 요석공주를 대동하고 분황사에 다녀왔습니다. 원효 스님의 법문에 은연 중 공주를 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기왕 마음을 굳히셨다면 서둘러도 될 것 같습니다. 공주도 분황사에 다녀온 뒤로 스님을 더욱 흠모하는 기색이 뚜렷합니다.”

김춘추는 두 왕후와 저녁 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과연, 과연. 원효는 세속을 등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자신의 해탈을 위해 평생을 수련하는 여타 스님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짐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부인께서 직접 원효스님의 의중을 보셨으니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서라벌에도 곧 꽃이 피고 벌 나비가 날아들 테니 좋은 날을 잡아 공주를 원효스님에게 하가하도록 하십시다. 원효가 스스로 파계를 하여 신라의 만백성들 가슴 속에게 파고들어 자신의 사상을 깊이 침투시키고자 하는 바를 짐이 간파하였습니다. 몰가부 노래도 그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폐하, 너무 조급하신 것 같습니다.”

김춘추의 말에 보희부인은 난색을 표하였다. 그러나 김춘추의 의도는 확고부동한 듯 보였다. 초저녁부터 김춘추, 김보희, 김문희 세 사람이 지밀전(至密殿)에서 조촐한 주연은 무척이나 재미있고 화기애애한 자리가 분명해 보였다.

김춘추는 술이 허량해지자 문명왕후와 보희부인을 번갈아 보면서 솟구치는 음심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김춘추는 문희를 맞을 때를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춘추는 술기운이 오르자 눈을 감고 옛 일을 회상했다.

“춘추야, 저 아이 배속에 있는 아이가 네 아이가 분명하렷다?”

김춘추는 유신공의 집에 놀러갔다가 유신공의 고의적인 희롱에 옷고름이 떨어졌다. 유신공은 큰누이동생 보희에게 김춘추의 옷고름을 꿰매도록 기회를 주었으나 보희는 부끄러워하며 주저하였다. 그때 보희부인의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떨어진 옷고름을 꿰매주었고 그 인연으로 문희는 김춘추와 통정(通情)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김유신은 여동생 문희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누구의 씨앗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김춘추가 머뭇거리자 서라벌 한 복판에 장작불을 지피고 사통하여 임신한 여동생 문희는 가문의 수치라고 소문을 내고 화형(火刑)에 처하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김춘추를 대동하고 서라벌 남산에 행차했던 선덕여왕은 서라벌 한 복판에서 연기가 나자 모르는 척 하였다. 덕만공주 선덕여왕은 이미 김유신과 김춘추의 관계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성골과 진골 등 골품제가 엄격했던 시대였다. 김춘추의 이모였던 선덕여왕은 성골의 자격이 있으면서도 진골로 지내며 대신들로 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조카 김춘추가 안타까웠다.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선덕여왕의 암묵적 승락하에 김춘추는 산 채로 화형을 당할 뻔한 사랑하는 여인 김문희를 구해 낼 수 있었다. 김춘추의 정실부인이 된 문희는 언니의 오줌 꿈을 산 연유로 왕비가 되자 늘 언니 보희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왕후, 그때 얼마를 주고 오줌을 사셨습니까?”

“네에?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문명왕후 김문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아비 김춘추와 언니 김보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오. 아니오. 내가 술이 좀 올라 해본 소리입니다.”

김춘추는 술잔은 연거푸 비우며 박장대소하였다. 보희부인과 문명왕후 김문희는 지아비의 말뜻을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 하며, 엉뚱한 이야기로 화재를 돌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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