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김춘추

“언니,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조카의 하가를 서두르는 게 좋아요. 아마도 조카와 원효스님의 혼사가 서라벌에 소문나면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일거에요. 먼젓번에 폐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조카와 원효스님의 혼사는 국가의 중흥과 백성들의 결집을 위한 중차대한 일이니 빨리 진행시키는 게 옳다고 봐요.

원효스님이 항상 폐하와 뜻을 같이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바에야 서둘러 하가시키는 게 좋다고 봐요. 그 스님 발목에 족쇄를 채워놓아야 그 스님이 폐하의 삼국통일에 대한 대망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을 겁니다. 왕실은 커다란 걸림돌을 제거하여 하늘을 떠받칠 든든한 기둥을 얻으니 좋고 그 스님은 파계하여 백성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명분이 있어서 좋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지요.”

문명왕후가 김춘추와 언니 보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너무 빠른 것 같아서-.”

요석공주의 이모 문명왕후가 한마디 거들자 보희부인은 난처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여봐라, 요석공주를 불러오너라.”

“폐하, 공주를 다 부르시다니요?”

보희부인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원숙미로 보나 미모로 보나 궁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있는 두 자매를 바라보는 김춘추의 시선에 행복감이 묻어있었다. 김춘추는 당사자인 요석공주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웬만해서 김춘추는 지밀전으로 왕자나 공주를 부르지 않았다.

“짐이 공주의 얼굴이 보고 싶구려. 그 아이를 본지도 꽤 된 듯 해요.”

김춘추의 말에 보희부인과 문명왕후의 표정이 엇갈렸다.

“폐하 이왕이면 궁궐에 있는 왕자들과 공주를 모두 부르시지 않고요?”

“그럴까요?”

문희는 장자인 김법민을 장차 보위에 올리고 싶어 했다. 문희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딸이 있었지만 제 각각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문명왕후 문희는 기회만 되면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들은 김춘추에게 자주 대면시키려 애를 썼다.

“여봐라, 지금 궁 안에 있는 왕자들과 공주들을 모두 이곳으로 들라하고 옥로주(玉露酒)와 맛있는 음식도 넉넉하게 내오도록 하라.”

“폐하, 궁궐 안에 있는 왕자, 공주들을 모두 부르시다니요?”

“짐이 아이들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요.”

보희부인은 동생 문희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으나 지아비 김춘추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서 나온 김개지문과 김지원 전군 그리고 요석공주는 분명 이 시각에 술에 절어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김춘추의 명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궁궐 안에 있던 왕자 공주들이 김춘추가 있는 지밀전으로 모여들었다. 부왕의 하명을 감히 어길 왕자와 공주는 없었다. 부왕의 말 한마디에 신라의 산천초목이 벌벌 떠는 세상이니 감히 김춘추의 명을 어길 수 있겠는가.

“소자 법민(法敏), 부왕과 두 분 어머님을 뵙습니다.”

“미거한 소자 인문(仁文), 부왕과 어머님 그리고 이모님을 뵙습니다.”

“소자 문왕(文王), 부왕과 두 분 어머님을 뵙습니다.”

“노차(金老且),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이모님을 뵙습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요석궁의 미거한 소녀가 아버님 문명이모님과 어머님을 뵙습니다."

요석공주가 살포시 웃으며 날아갈 듯 세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소자 지경(智鏡), 부왕과 어머님, 이모님을 뵙습니다. 그 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소자 개지문, 부왕과 왕후님 그리고 어머님을 뵙습니다.”

“소자 지원, 부왕과 왕후님과 어머님을 뵙습니다.”

“소녀 지소(智炤), 부왕과 어머님, 이모님을 뵙습니다.”

문명왕후의 소생으로 나이 어린 김춘추의 셋째딸 지소공주가 넙죽 엎드려 절을 하자 김춘추의 입이 벌어졌다. 김춘추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여운 막내딸이었다.

“소자 차득(車得), 부왕과 두 분 왕후님에게 인사 올립니다.”

“소자 마득(馬得), 아버님과 두 분 왕후님을 뵙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김춘추의 네 번째 부인 용보(龍寶)의 소생 차득과 마득 전군이 김춘추와 김보희, 문희 자매에게 절을 하였다.

“오냐, 오냐. 너희들을 보니 짐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구나.”

“폐하께서는 복도 많으십니다.”

문명왕후가 여러 왕자, 전군, 공주를 둘러보고 지아비 김춘추를 보며 한마디 하였다.

“그래요? 왕후, 오늘 궁궐에서 무슨 잔치라도 있었습니까?”

“폐하, 오늘 법민이 여러 동생들과 누이들을 초대하여 조촐한 연회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법민 왕자가 폐하를 도와 동정서벌(東征西伐)하느라 동생들을 건사도 못하고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여 오늘 위무연을 열었답니다.”

“짐만 모르고 있었구려.”

“폐하께서는 국사로 바쁘시니 아이들만 모인 듯 합니다.”

김춘추는 장자 법민을 비롯한 자신의 소생들을 일일이 바라보며 흐뭇한 얼굴을 하였다.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첫째부인 보라궁주의 소생인 고타소(古陀炤) 공주와 김문주 그리고 몇몇 전군(殿君)들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고타소 공주는 얼마 전에 대야성에서 남편 김품석과 백제군을 맞서 싸우다 사망하였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었다.

아들딸 11명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대부분 입에서 독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부왕의 지엄한 명령이라 궁궐 안에 있던 왕자와 공주 그리고 전군들은 부왕의 명을 받들어야 했다. 부왕의 명을 받고 달려온 왕자, 공주, 전군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바싹 긴장한 상태였다.

“아버님, 소자가 여러 형제자매를 초빙하여 다과를 베풀고 있었사옵니다. 갑자기 저희들을 찾으시니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걱정하였사옵니다.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장자 김법민이 형제자매를 대신하여 부왕 김춘추에게 고하였다. 김법민은 후리후리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전장에 나가면 무척 용맹하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훗날 김춘추의 보위를 이을 강력한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것 참으로 잘 되었구나. 아비가 너희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보는 게 얼마만이지 모르겠구나. 이 아비나 너희 모두 각자의 사생활이 있으니 그려러니 생각한다. 너희들은 갑자기 부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석공주를 원효스님에게 하가시키려고 하는데 너희들의 뜻이 어떤지 궁금하구나. 이 아비의 처사에 이의가 있거나 불만이 있으면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해보거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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