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중구삭금

성골은 김씨 왕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되었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나 원래 왕이 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성골이 소멸되자 태종무열왕인 김춘추부터는 왕위에 올랐다. 그 뒤로 부터 신라왕조가 왕건에 의해 문을 닫을 때까지 모든 왕은 진골 출신이었다.

물론, 상위계급이라고 하더라도 특권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가령, 진골 바로 다음가는 6두품은 득난(得難)이라고 불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좀처럼 차지하기 어려운 신분이었다. 이 신분에 속한 사람들은 본래 신라를 구성한 여러 씨족장의 후예와 신라에 정복된 작은 나라들의 지배층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골품에 따른 관직제도의 규정상 주요 관청의 장관이나 주요 군부대의 지휘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관리나 군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학자, 종교가 또는 사상가가 되는 길을 택하는 사람이 많았다. 원효스님과 고운 최치원 등은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을 부인으로 맞이했으나, 신라왕족의 혼인관례를 어겼다는 이유로 왕실은 물론, 전통적인 경주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였다. 진지왕의 손자이며, 진평왕의 외손이었던 그가 성골의 대우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진골로 여겨진 것은 바로 이 파계적인 혼인 때문이었다.

“폐하, 원효스님이 잠적을 한 듯 합니다. 서라벌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 잠적을 하였다고요? 서라벌에 나타나지 않는다고요?”

“요즘 저자거리는 요석공주와 원효스님의 혼인문제로 벌집 쑤셔놓은 듯하자 이에 부담을 느낀 스님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듯 하옵니다.”

김춘추는 문명왕후와 점심을 들고 있었다. 보통 아침 식사는 보희부인과 점심 식사는 문명왕후 김문희와 함께하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이거 큰일이구려. 조정에서 요석공주와 혼인한다고 발표했는데 정작 신랑이 될 사람이 사라졌다면 세상에 큰 웃음거리가 되겠구려. 전국에 명을 내려 속히 원효스님을 서라벌로 모셔오라 해야겠습니다.”

“폐하, 원효스님이 알아서 스스로 서라벌로 찾아오도록 하시지요? 그게 더 좋지 않겠어요?”

문희가 금잔에 반주(飯酒)를 따르며 지아비 김춘추의 눈치를 살폈다.

“왕후, 어떻게 하면 원효스님이 서라벌로 스스로 오게 할까요?”

“혼인 날짜를 발표하는 겁니다.”

“혼인 날짜를요? 원효스님과 상의도 하지 않고 신부 측에서 먼저 날짜를 잡는단 말이오?”

김춘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에 문명왕후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혼인 날짜를 발표하면 제 아무리 영걸이라 하여도 서라벌에 나타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중구삭금적훼소골(衆口鑠金積毀銷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이고 헐뜯음이 쌓이면 뼈도 삭힌다’라는 의미입니다. 폐하, 소첩의 의견대로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날짜를 잡아 공표하세요.”

문명왕후가 고기반찬을 집어 김춘추의 밥숟가락에 올려놓았다.

‘혼인 날짜를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린다? 그리되면 과연 원효스님이 서라벌에 다시 나타날까? 만약 안 나타나면 큰 망신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왕후, 요석 공주에게 미리 상의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김춘추는 요석공주의 달거리 기간이 궁금하였다.

“폐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아이 몸 상태를 소첩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 뿐만 아니라 왕실의 여인들 상태까지 잘 파악하고 있답니다.”

“그래요? 과연, 왕실의 안주인답구려.”

김춘추는 문명왕후와 보희부인을 정실로 두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측실(側室)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두 왕후의 묵시적 승낙 하에 은밀하게 다른 여인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개똥어멈, 소문 들었수?”

“쇠똥어멈, 뭔 소문?”

“이런 멍청한 여편네. 내달 초사흗날 원효스님과 요석공주가 혼례를 치른다는 소문이 서라벌에 파다한데, 못 들었단 말이여?”

신라 왕실에서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혼인 날짜를 발표하자 서라벌뿐만 아니라 신라 전체가 들썩거렸다.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는 절대로 요석공주님과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는 날짜까지 잡다니. 남자는 그저 믿을 게 못되는 동물들이야.”

은지는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며, 신세타령을 하고 있었다.

“은지야, 네가 아무리 울고불고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너, 정말로 원효스님 말을 믿고 있었던 게야?”

극락의 큰 주모는 원효스님을 좋아하는 은지가 참으로 멍청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말을 하지 않았었다.

“언니, 원효스님은 나에게 신선한 공기와 같은 존재에요. 이제 그 공기가 내 곁에 없어지는데 제가 어찌 살겠어요. 저 정말로 원효스님을 사랑

했다고요. 사랑하는 남자를 공주에게 빼앗기게 된 마당에 제가 세상을 살아가면 무엇 하겠어요.”

“바보 같은 년아, 정신 차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년들이 바로 바람처럼 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스님을 좋아하는 년들이라니까. 어이구, 쯔쯔쯔쯔-.”

“언니가 제 속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지, 만약 알면 절대로 그런 말 못

할 거유.”

“어이구. 저 멍청한 것. 언제 철이 들려나.”

극락의 다른 기녀들까지 은지를 다독거리며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 부처님의 존엄을 훼손하는 미치광이 땡중 원효는 지금 당장 신라를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말라.

- 말도 안 되는 기행을 일삼으며, 백성을 기망하는 돌팔이 땡중 설서당(薛誓幢)은 신라 만백성에게 사죄하라.

- 육두품 주제에 왕실의 여인을 탐하려는 원효는 즉각 산에서 나와 입장을 밝혀라.

- 불제자로서 왕실의 여체(女體)를 탐하려는 설씨(薛氏)는 불문(佛門)에서 떠나라.

-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가짜 중 설신당(薛新幢)은 즉시 산에서 나와 도반들에게 사죄하라.

- 가짜 중 원효는 숨지 말고 즉시 나와 진심을 말하라.

- 만백성을 기망하는 땡중 원효는 당장 법복을 벗고 자숙하라.

- 왕실 과부에게 눈독을 들이는 땡중은 이 땅에서 당장 사라져라.

- 부처님을 팔며, 술과 여인을 탐하는 가짜 중 설씨, 원효는 더 이상 사문(沙門)을 더럽히지 마라.

- 가짜 중 원효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제 할아버지인 제7대 풍월주 설원랑(薛元郞)과 잉피공(仍皮公) 그리고 아버지 설담날(薛談捺)을 욕되게 하지 말라.

- 과부가 된 요석공주의 육신을 안고 싶어 파계(破戒)한 원효는 영원히 불문에서 떠나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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