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임주아

당신이 내 처음이야 말하던 젊은 아빠 입가엔 수염이 복숭아솜털처럼 엷게 돋아나 있었겠지 엄마는 겁도 없이 복숭아를 앙 물었겠지 언제부터 뱃속에 단물이 똑똑 차오르고 있었는지 모르지 이상하다 이상하다 당신이 매일 쓰다듬은 곡선이 나였는지

그해 여름 홍수 난 집 마당에 떨어진 복숭아 두 알 막 태어난 아기 얼굴 같은, 산모가 위험하니 그냥 낳으세요, 그냥 나온 나는 태어나 백도복숭아처럼 물컹한 젖을 물고 눈을 끔뻑거렸겠지 눕혀두면 하루 종일 잠만 자니 얼마나 좋은지 엄마는 말했지

깨어나면 조금은 소란스러운 십 층집 어느 날 무선전화기가 날아다니는 종종 창문 밖으로 식탁 의자가 떨어지는 떨어진 의자가 일층 정원을 박살내는 동네방네 돌아다닌 소문이 햇볕을 꺾는 대낮 바람결에 모빌은 돌아가지 아이 좋아, 동해안 한 바퀴 시원하게 돌고 온 아빠 곰 같은 등 뒤에 서너 해 살다간 여자 풋복숭아 자국 돋아나는 눈두덩이 엄마 어디 가

짓이겨진 과육을 뚝뚝 흘리면서 나는 천천히 무릎을 쓰다듬지 뭉게뭉게 피어나는 욕탕에서 오랜만에 만난 당신의 살을 만지지 복숭아껍질 따가운 살갗, 엉덩이가 반으로 쪼개지는 기분이야 붉은 속살,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온탕과 냉탕 사이에서 애인과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놀지 더 이상 처음이 아닌 우리에게 또 한 철이

어렸을 때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살았다. 마땅히 놀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언니들과 서로 턱을 보이면서 누가 더 복숭아씨 같은지 내기를 하면서 힘껏 턱에 힘을 주었던 기억이 있다,

이 시는 시로서는 다시 봐도 참 좋은 시다. 복숭아라는 제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절묘하게 엮었다. 첫 연은 아빠의 턱을 복숭아씨로 보였고, 둘째 연은 글쓴이 자신을 복숭아에 대입하였고 셋째 연은 아빠의 젊은 첩을 풋복숭아로 비유하였고, 마지막 연은 복숭아도 한철이듯 인생이 한철이라는 요지로 마무리하였다.

현실자각(現實自覺)도 아니고 사실수리론(事實受理論-백철의 주장. 종전에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현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자는 논리)도 아닌, 현실인정(現實認定)으로 담담히 쓰였다고 해석한다. 젊은 시인의 젊은 시답게 발랄하고 솔직 담백하여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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