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서라벌 저자거리 곳곳에는 원효스님을 비방하는 불제자들과 백성들의 글들이 사방에 나붙었다. 방을 접한 김춘추와 지도부 대신들은 크게 당황하였고 신라의 고승대덕들은 민심의 향배에 신경을 써야 했다.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던 원효스님은 서라벌에서 날아드는 소문을 듣고 속으로 무척 당황하였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들 같으니.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를 곡해하고 있구나. 지난 육백여년 동안 이 나라를 지탱해온 못된 적폐를 일소하고 만백성이 일체가 되는 새로운 불국정토를 만들려는 나의 뜻을 저리 해석하다니. 내 스스로 백성들 마음에 파고들기 위해서는 파계해야 한다. 파계하지 않고서는 일반 백성들이 나를 따르려하지 않을 것이야.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가짐으로써 파계하는 거야.

출가 전에 싯타르타에게도 부인 아쇼다라가 있고 아들 라후라(羅睺羅)가 있지 않은가? 세속에 처자식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떠한 자세와 태도로 불법을 전승시키고 실천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거야. 나의 뜻이 김춘추가 원하는 뜻과 상치되지만 한편으로는 맞아떨어지는 바도 있어. 일체가 유심조로다. 나무아미타불광세음보살.’

“스님, 스님, 서라벌 저자거리에 스님을 비방하는 벽보 수백 장이 붙었답니다. 소식 들으셨어유?”

“나무아미타불관자재보살. 소승도 어제 들었습니다.”

“그럼, 어찌 하시게 유? 정말로 요석공주님과 혼인하시게 유?”

암자에 기거하는 나이 많은 불목하니가 원효스님에게 속삭였다.

“서라벌로 가서 소란을 잠재워야지요.”

“어떻게요?”

“공주가 소승을 원하니 일단 찾아가봐야겠지요.”

“네에? 저, 정말로 공주님과 혼례를 치르시게요?”

“삼라만상 모든 것이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 아니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관자재보살.”

원효스님의 여유 만만한 태도에 불목하니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다음날 새벽 원효스님은 날이 밝기 전에 지리산을 내려와 서라벌로 향했다.

“폐하, 이제 사흘 후면 우리 요석공주가 원효스님과 혼례식을 치르는 날입니다. 듣자하니 원효스님이 서라벌에 나타났다합니다. 혼례준비는 소첩이 아랫것들에게 명해서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과연 왕후 말대로 중구삭금이야. 중구삭금.’

“그래요? 짐이 예부(禮部)에도 명을 내렸습니다. 부인은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춘추는 보희부인과 아침 수라상을 받고 있었다.

“폐하, 저자거리에 원효스님을 비방하는 벽보들이 수도 없이 붙었답니다. 이러다가 원효스님이 불량배들에게 욕을 보는 게 아닌지 불안합니다. 날짜를 너무 길에 잡은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부인, 너무 불안해할 거 없어요. 못난 놈들이나 숨어서 욕을 하는 겁니다. 원효스님은 일당백 아니지 일당 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교리(敎理), 천문지리, 인생사, 역사뿐만 아니라 하늘 아래와 하늘 위 삼라만상에 대하여 모든 이치를 깨닫고 있는 분이랍니다.”

“그러니까 요석이 원효스님을 생불이라 하겠지요. 그러나 원효스님도 인간인지라 어두운 밤에 홀로 길을 걷다가 악기(惡氣)에 의해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도 됩니다.”

“부인, 원효스님은 금강역사(金剛力士)입니다. 부처님께서 항시 원효스님의 어깨에 앉아서 삿된 기운을 막아주지요.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만간 원효스님이 요석궁을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머나, 그래요? 페하께서 사람을 보내셨나요? 스님을 모셔오라고.”

보희부인은 기쁨 반 걱정 반 섞인 표정을 지었다.

‘내달 초사흗날이 며칠 안 남았는데.’

“여봐라, 어서 대총관을 드시라하라.”

“아니, 폐하. 아침부터 오라버니는 왜 드시라고 하세요?”

보희부인이 고기반찬을 집어 김춘추의 밥숟가락에 올렸다.

“원효스님을 요석궁으로 들게 하려는 방법에 대하여 논의를 할까 합니다. 이미 신라 전역에 우리 요석공주와 원효스님이 내달 초사흗날 혼인한다고 공표하였으니 적절히 대처해서 혼인이 잘 마무리 돼야 하겠지요. 원효스님을 스스로 요석궁에 들게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스님이 자연스럽게 궁 안으로 들도록 묘책을 강구해야 겠어요.”

김춘추의 양 미간이 좁아졌다.

“폐하, 불문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서라벌 백성들까지 나서 우리 공주와 혼인하려는 원효스님을 강하게 비난한다고 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칫 혼사가 그르칠까 걱정입니다.”

“부인,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다 잘 될 겁니다.”

김춘추는 반주를 들며, 흡족한 얼굴로 보희부인을 바라보았다. 늘 울밑에선 봉선화처럼 말수가 적고 궁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보희부인이 고마웠다.

“뭣, 뭐라고? 사흘 전에 은지가 음독하였다고? 어찌 이런.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네에. 스님이 내달 초사흗날 공주님과 혼인하신다는 날짜가 발표되자 밤새 울다가 음독하였어요”

극락의 주모는 가슴을 치며 눈물을 훔쳤다.

“주모, 정말로 은지가 음독자살을 하였소. 무덤은 어디 있소?"

“이미 서라벌에 은지가 스님을 연모하다 죽었다고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스님만 모르고 계셔요. 남산 아래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답니다.

“나무아미타불, 아아-, 이럴 수가. 내가 그 아이를 죽게 만들었구나.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지리산에서 내려와 서라벌에 도착한 스님이 땅거미가 내려앉을 즈음 극락에 들렸다.

‘저는 스님 없으면 팍-, 죽어버릴 거에요. 정말이라고요. 정말로 스님이 공주하고 혼인하면 이년, 정말로 칼을 입에 물고 죽을 거라고요.’

원효스님은 지난번 극락에 들러 은지와 술을 마실 때 은지가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때는 기녀가 그냥 지나가는 말이려니 하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내가 화랑 시절 백제와 전투에서 무수히 적군을 베었어도 전혀 슬프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없었거늘. 그 아이의 죽음이 왜 이리도 가슴이 아프단 말이냐. 진정으로 그 아이가 나를 은애하였더란 말이더냐?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도는 이 못난 중을. 먼 훗날 해탈하지 못하고 명부(冥府)에 들면 염왕(閻王)과 그 아이한테 무슨 말로 용서를 빌어야 한단 말인가. 은지야, 은지야-. 미안하구나. 정말로 미안하다. 나무아미타불지장보살마하살. 지장보살마하살-.”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