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민박, 편지 1
김경주

주전자 속엔 파도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인편이 잘린 외딴 바닷가 민박집,

목단이불을 다리에 둘둘 말고 편지를 썼다

들창사이로 폭설은 내리고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들을 만지고 있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처럼 쌓여갔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쓰다만 편지지로 소금바람이 하얗게 쌓여 가는 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움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쓸쓸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푹푹 끓기 시작하고

방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몸은 피 속에서 눈물을 조용히 번식시켰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떼죽음 당하는 내면들, 불면은

나 아닌 곳에 가서 쌓이는 가혹한 삶의 은유인가

눈발은 마을의 불빛마저 하나씩 덮어 가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혹성같은 낱말들을

편지지에 별처럼 새겨 넣곤 하였다

이 시를 보면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이란 시도 함께 생각이 난다. 굳이 두 시의 차이점이라면 안도현의 시는 응시凝視에 더 가깝고 김경주의 시는 관조(觀照)에 가깝다.

관조란 글쓴이의 주관적인 생각이 다소 배제된 제 삼자의 입장에서 사물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이고 응시란 글쓴이의 내적사고가 녹여진 시선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란 싯구에서 보듯이 안도현의 시는 자아가 녹아있다.

반면 김경주의 시는 사진에 찍힌 사진처럼 혹은 화가의 그림처럼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두 시 모두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표본이 될 만큼 좋은 시임에는 틀림없다.

위 김경주의 시는 더욱더 거의 행마다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다. ‘주전자 속에서 파도소리가 끓고 있다’ 라든지 ‘불빛들이 방안에 엎질러지곤 했다’는 것은 섬세하고 기본적인 시적표현이다.

시를 많이 쓰다보면 어떤 시인도 차후에는 너무 지나친 시적 표현이 유치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자재하여 심심할 만큼 담백해지는 경향도 있지만 시적 표현이 넘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는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겨울이 갔다. 이봄 시상이 만개하여 온 세상에 선하고 아름다운 뉴스만 흘러 넘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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