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운우

“어머나, 태진부인 선물한 엽자가 참으로 기이합니다. 소녀경은 이미 수차례 본적이 있어서 흥미가 없지만 엽자는 기가 막힙니다.”

“그래요. 엽자가 그리 기이합니까?”

‘신선들이 이런 책자를 가지고 있더란 말인가. 정말로 기가 막히구나. 남녀가 즐길 수 있는 서른여섯 가지의 다양한 자세가 그려진 그림책이로구나. 과연 요지경 속이로다.’

설랑과 공주는 엽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서당랑, 오늘 서른여섯가지 자세를 모두 구사하여 지극한 열락의 밤을 보내셔야죠?”

“공주께서 이미 익숙한 자세가 아니던가요?”

“열여덟 형태는 이미 체험해본 자세입니다만 나머지는 처음 보는 장면이에요.”

방사에 있어서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있는 요석공주였다.

“그럼, 밤을 꼬박 새우더라도 엽자에 그려진 서른여섯 가지를 모두 경험해보도록 하지요.”

“정말이지요? 서당랑이 코피가 터지면 어쩌시려고요?”

요석공주는 배꼽을 잡았다. 두 사람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던지고 엽자를 보며 속삭였다.

“그럼. 이 자세로 시작할까요.”

설랑의 말에 공주는 흔쾌히 자세를 취하였다. 침전은 황금색 휘장으로 둘러 처져 있고 침상은 너무 푹신하고 아늑하여 금방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침전에는 여러 개의 촛불이 대낮처럼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공주는 설랑을 끌어안았다.

“어머나. 이를 어째. 공주께서 태진부인께서 선물한 소녀경을 읽어보지도 않고 운우의 정을 나누려 하시네.”

“공주는 이미 그 방면에 도통하여 책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럼, 엽자만 있어도 되겠네. 그러나 서른여섯 가지 방중술을 모두 체험하려면 밤을 새워도 시간이 안 될 터인데.”

침전 문 앞에 시비들이 설랑과 공주가 들어 있는 침전 내실을 엿보며, 시시덕거렸다.

“여봐라. 어서, 어서 요석궁으로 가보자.”

“폐하, 아직 새벽닭이 울지도 않았사온데 거길 왜 가시려고요?”

김춘추는 날이 밝기도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내관을 불렀다. 밖에는 천둥번개가 치면서 억수같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 딸, 내 딸. 요석이 간밤에 잘 잤는지 궁금하구려.”

김춘추는 술이 덜 깬 상태로 주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몸이 휘청거리면서도 기어이 일어나 내관과 함께 요석궁으로 가려고 하였다.

“폐하, 정말로 주책이십니다. 원효스님과 요석공주가 한두 살 먹은 아이들도 아니고 어른들이랍니다.”

문명왕후는 기가 막혔다.

“짐이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이 나라 천년대계가 잘 만들어 졌는지 짐이 이 두 눈으로 확인해야 겠어요. 왕후도 같이 가십시다.”

문명왕후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각에 느닷없이 일어나 요석궁에 가자고 하는 지아비가 얄미웠다.

‘고타소 공주가 혼인하였을 때에는 저런 행동을 보이지도 않으시더니, 어째서 요석공주에게 저리 목을 매시는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로다. 그놈의 몰가부인가 뭔가가 생사람 잡겠구나.’

문명왕후 김문희는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내관은 어서 앞장서거라.”

“폐하-, 비가 그치면 가시지요.”

“이놈, 짐이 앞장서라면 설 것이지 무슨 잔말이 많으냐.”

“폐하-, 아직 날도 밝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내관 말대로 비가 그치면 가세요.”

문명왕후가 김춘추를 가로 막아섰지만 지아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오. 내 마음이 급하오. 어서 가자.”

“폐하께서 요석궁으로 납시신다. 어서 채비를 하라.”

내관은 할 수 없이 김춘추와 요석궁으로 향하였다. 왕이 머무는 본궁에서 요석궁까지는 대략 이천여보 정도 떨어져 있어 어른 걸음으로 간다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요석궁을 지키던 보초병들과 군관이 소식을 듣고 왕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폐하 납시오.”

내관이 김춘추가 요석궁에 도착하였음을 알리는 소리에 요석궁은 갑자기 부산해졌다. 요석궁을 호위하던 초병들과 궁녀들은 요석궁 출입문 앞에 일렬로 도열하고 있다가 김춘추가 도착하자 고개를 숙였다. 군관이 큰 우산을 쓰고 나타난 김춘추 앞에 나가 큰소리로 이상 유무를 보고하였다.

“간전이는 어디 있느냐?”

“폐하, 간전이 여기 있사옵니다.”

비에 젖은 생쥐 꼴로 간전이가 하품을 하며, 김춘추 앞으로 튀어 나왔다. 요석궁의 궁녀 간전이는 간밤에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초야를 훔쳐보느라 한숨도 자지 못하였다. 양쪽 눈의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간밤의 일을 소상하게 아뢰어라. 원효스님이 요석궁에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아뢰어라.”

“폐하, 두 분께서 내실에 드신 후 식사를 하시고 합환주를 드신 다음 잠을 청하셨습니다. 소녀는 내실 문이 굳게 닫혀 내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것도 볼 수 없었사옵니다. 그리고 두 분은 아직도 주무시고 계시는지라.”

“뭐라? 날이 훤히 밝았는데 아직도 잠자리에 들어 있더란 말이냐?”

김춘추는 간전이를 노려보았다.

‘아니, 원효와 요석이 밤새 술을 마셨나? 아직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니? 별 일이 다 있구나. 새벽 예불을 올리고도 남을 시각인데 아직도 두 사람이 잠을 자고 있다니-.’

“여봐라. 간전이는 앞장서거라. 짐이 아직 잠을 자는지, 일어났는지 직접 확인해야 겠다.”

간전이는 걱정이 앞섰다.

“페하, 두 분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습니다.”

“어험. 짐이 직접 확인해 봐야 겠다.”

“폐하, 두 분 간밤에 늦게 주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뭐 어쨌다는 것이냐?”

김춘추는 직접 앞서서 요석궁 내실 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왕이라고 하나 딸과 사위 될 사람이 잠을 자고 있는 침전에 드시겠다니, 전하께서 실성을 하셨나? 두 분이 부둥켜안고 곤히 잠자리에 들어 있을 터인데. 이를 어쩌나?’

“폐하, 내실은 소녀가 들어가 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침전 문 밖에서 잠시 기다려 주소서.”

“어험. 알았다. 어서 들어가 짐이 왔다고 전하거라.”

간전이는 김춘추가 직접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갈까 봐 겁이 덜컥 났다. 간밤에 몰래 훔쳐봤던 다양하고 기기묘묘한 두 사람의 사랑의 행태가 떠올랐다.

‘아아, 불법을 연마하는 스님이 어떻게 그 처럼 신비한 자세로 여인을 녹초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어젯밤 훔쳐본 장면을 생각만하여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속이 울렁거려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구나. 나는 남편과 수백, 수천 번 정사를 나누었지만 그처럼 열정적이고 다양한 자세로 사랑을 나눈 적이 없었어. 나는 그동안 정말로 참으로 밋밋한 혼인생활을 하였구나.’

간전이는 간밤에 본 황홀한 장면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장면은 죽기 전까지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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