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도라산 연가

무비는 왕에게 부러 폐하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왕은 사냥을 간다 며 무비와 지공거(知貢擧) 송린, 장군 도성기, 환관 최세연(崔世延), 전숙(全淑), 방종저(方宗氐) 등을 대동하고 도라산 기슭에 임시 거처를 마 련하여 머물고 있었다.

이곳은 자주는 아니지만 왕이 왕비와 언쟁을 벌이거나 답답할 때 들리는 처소였다. 왕과 무비 일행이 궁을 떠난 지 벌써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라의 대소 정사(政事)는 왕비 홀도로게리미실이 알아서 처결하고 있으니 왕은 신경 쓸 것이 없었다. 왕은 등극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중요한 일부터 사소한 사안까지 왕 비와 친원파 중신들이 상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관례화 되다시피 했다.

무비는 비록 지방 출신이지만 타고난 미모는 고려에서 최고였다. 왕은 지금까지 무비만큼 어여쁜 여인을 본적이 없었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했다. 홀도로게리미실은 여인이라기보다는 몽고 초원에서 말을 타 고 사냥하는 여자 무사(武士)라고 하면 딱 어울렸다. 왕은 왁살스럽고 거드럭거리는 왕비의 품행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 정도였다.

궁궐에서는 나인들이나 환관들은 시무비를 시비마마(柴妃媽媽)라 불 렀다. 왕은 무비를 총애하면서도 그녀에게 후궁 첩지를 내리지 못했다. 왕이 무비에게 후궁 첩지를 내리려고 하면 친원파 중신들이 무비는 근본 이 천한 출신이라며 반대하고 나서기 때문이었다.

무비는 어려서부터 가 무에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일찍 도성기에게 발탁되어 가무를 익혔는데 특히 그녀의 정읍사(井邑詞)에 맞춰 추는 춤은 사내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하였다.

“폐하, 소첩과 함께 추시어요.”

무비가 일어나면서 왕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술에 취한 왕은 시무비 의 옥수(玉手)를 잡고 일어나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악공이 연주 하는 음악에 맞춰 무비는 노래를 하며 왕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음악을 지휘하는 자는 환관 도성기 였다.

달하 노피곰 도드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왕은 술이 올라 불콰한 얼굴로 무비의 나긋나긋한 허리를 감싸 안고 돌았다. 무비의 노래는 경쾌하다가 갑자기 느려지면서 슬퍼지기도 하면 서 사내의 감성을 자극하였다. 무비는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도성기의 수신호에 따라 움직였다.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고 있던 환관 최세연과 전숙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최세연은 스스로 남경(男莖)을 거세하고 도성기의 연줄에 의해 환관이 된 자였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은 정 읍사를 연주하면서도 무비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쳐다보느라 자주 실수 를 연발하였다.

진주와 비취가 박힌 황금빛 화관에 하얀 비단옷을 입은 무비는 이슬을 머금은 한 송이 꽃과 같았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무비의 시선은 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왕은 술에 취하고 무비의 미모와 노래 에 취하여 얼이 반쯤 나간 듯 보였다.

시(柴)씨는 당나라 때 절강성 구해도 임분현에서 계출(繼出)된 성씨 로서 당나라가 망한 뒤에 번성하면서 유명해 졌다. 당나라 멸망 후 대륙 에는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중 가장 강력한 국가 였던 후주(後周)의 2대 황제 세종(世宗)의 이름이 시영(柴榮)이었다.

그는 전쟁 도중에 사망하는 바람에 그의 신하였던 조광윤(趙匡胤)이 시영 의 어린 아들로부터 대권을 양위 받아 송(宋) 나라를 건국하였다.

시영의 후손들 중 일부가 고려로 흘러 들어와 태인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추측 된다. 시씨 중에는 고려 현종(顯宗)때 평안도 의주 흥화진(興化鎭)의 총책임자를 지낸 시신운(柴臣雲)이 있었지만 고려에서 크게 세력을 형 성한 가문은 아니었다.

백제의 멸망으로 이 지역 백성들은 오랜 세월 망 국의 억울함과 한을 가슴에 담고 살아왔다. 시무비는 그 응어리를 백제 가요를 통해 노래와 춤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폐하, 소첩과 춤을 추시느라 힘드셨지요? 한잔 드시어요.”

무비는 땀을 흘리며 앉아 있는 왕에게 술을 권했다.

“너의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어서 그런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왕은 곁에 앉아있는 무비를 살짝 안으며 잔을 비웠다.

“폐하, 시비마마의 가무는 고려에서 최고입니다. 원나라에도 시비마마 같이 미모와 가무가 뛰어난 가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 시비마 마께서 요즘 부쩍 외로움을 타시는 거 같사옵니다. 특히 궁에 계실 때는 왕비마마의 간섭이 너무 심하시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으십니다.”

환관 도성기가 왕과 무비에게 비나리쳤다.

“과인은 늘 정사에 바쁘니 경들이 과인에게 하는 것만큼 무비를 보호 해주구려. 왕비는 몽고 초원에서 말달리던 미욱한 여장부이니 크게 신경쓰지 마오. 짐의 마음은 늘 무비에게 가 있으니…….”

무비와 송린, 도성기, 최세연, 전숙, 방종저 등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왕에게 감사해 하였다.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무비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라도 태인 지역 인사들의 결사(結社)는 원나라의 강압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운동이었다.

그것은 곧 홀도로게리미실에 대한 반발이 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에 머물고 있는 세자 왕원(王 謜 )에 대한 반감이기도 했다. 왕은 무비를 핵심으로 단합하는 국내파들의 존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왕이 그렇게 묵인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5년 전 왕원이 원나라에서 임시 귀국할 때 일이었다.

왕원은 부왕에게 ‘머리를 숙이고 의주까지 나와 환영하라’고 일방적으 로 통지하였다. 이때의 왕원은 고려인이 아니라 원나라 사람이나 마찬 가지였다. 아들의 요구에 부왕은 할 수 없이 마중을 나가기는 했지만 체 면은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이처럼 아들이 부왕에게 명령조로 말 한 것은 세자가 고려로 돌아오기 2년 전에 있었던 사건에 기인한다.원 나라 황제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든 원나라 내의 일부 세력인 카다안(哈丹)의 무리가 황제의 군대에게 패퇴하여 고려 국경을 침범하였다. 이에 놀란 고려왕은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왕원은 외할아버지 쿠빌라이에게 군사를 빌려 카다안 무리를 격퇴시켰다. 이 일로 원나라에 서는 고려왕보다 왕원을 더 신뢰하였다. 이때부터 왕원은 원나라 황실의 신임을 등에 업고 부왕을 무시하며 고려왕처럼 행세하였다.

왕원의 몸에 는 징기스칸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의 말, 행동, 습관 등은 이미 원나 라 황자(皇子)나 다름없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왕비의 태도 도 한몫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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