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시무비의 반격

왕비가 아무리 꽃단장을 하고 있어도 왕은 일 년 내내 왕비의 처소에 드는 일이 없었다. 왕이 홀도로게리미실 과 혼인한지 20여년이 넘어도 혼인 초기 서너 번의 합방 이외에는 각자 생활하다보니 부부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겉모양만 부부였다.

“마마, 몽고년의 측근들이 또 무슨 흉계를 꾸미는 듯 합니다. 지난번 외설스러운 노래를 저자거리에 퍼트려도 실효가 없자 이번에는 또 다른 흉계를 꾸미는 듯 하니 철저하게 대비하셔야 합니다.”

송린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비의 처소에 송린과 도성기를 비롯한 국내파들이 모였다. 국내파들은 사나흘에 한 번씩 무비의 처소에 모여 회의를 하였다.

“지공거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습니다.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시비마마께서 후궁의 첩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나 폐하께서 정사에 흥미를 잃은 것도 천한 몽고녀(蒙古女)가 왕비 가 된 탓입니다.”

도성기 장군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자신의 뜻을 피력하였다.

“도장군, 시비마마를 위하여 좋은 방책이 있으면 말해보구려.”

송린이 도성기의 잔에 술을 따르며 넌지시 물었다.

“얼마 전에 고려에서 제일 영험하다는 무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녀의 주술(呪術)이면 안 통하는 일이 없답니다. 해서, 몽고녀의 수명을 단축하기 위하여 소장(小將)이 그녀에게 묘안을 주문했으며 곧 시행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도장군, 그 일은 여기 모인 우리들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비가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나지막하게 속살거렸다. 무비는 자신 이 왕의 총애를 입는 동안 고려의 조정에서 몽고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골몰해 왔었다. 무비와 측근들은 고려 조정이 자주권을 찾고 백성들이 원나라의 착취와 수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거대한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 킬 수도 없는 상황에서 국내파가 할 수 있는 일은 귀신도 모르게 왕비와 친원파 들을 제거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도성기는 개경 인근에 있는 무녀 천옥(天玉)의 집을 자주 찾았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무당으로 가 업을 잇고 있었다. 그녀는 주술뿐만 아니라 사술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 지고 있었다. 국내파들은 천옥의 묘술을 이용하여 왕비를 제거할 계획을 짜놓고 시행 방법을 찾고 있었다. 왕비의 곁에는 겁령구 들이 항상 진을 치고 있는 관계로 사사로이 왕비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이 약은 황천진액단명고(黃泉津液短命蠱)라는 약입니다. 이 약을 차 나 물 또는 술에 미량을 타서 두 달만 마시게 하면 상대가 모르는 사이에 중독됩니다. 중독되면 오장육부가 제 기능을 상실하여 몸이 마르고 하혈 을 하게 됩니다. 우선 두 달 치만 드리겠습니다.”

천옥은 도성기에게 붉은 종이에 쌓인 약을 건넸다.

“참으로 명약이구려. 뿐만 아니라 그대가 밤낮으로 저주를 퍼부어 주 구려. 여기 몽고출신 왕비의 사주(四柱)가 있소.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우리를 믿고 일을 해주시오. 이번 일만 잘 되면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 이든 다 해주겠소. 이 일은 고려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내는 중차대한 일이오.”

“소인은 도장군님만 믿겠습니다.”

무녀에게 약을 건네받은 도성기는 왕비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궁인 을 물색하였다. 왕비 주변에는 여러 명의 고려 출신 궁녀들이 있었지만 믿을 수 있는 궁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왕비 처소에서 일하는 궁인 중에 예전부터 환관 최세연과 연분이 있었던 초비라는 궁인(宮人) 이 있었다. 그녀는 경성궁에서 일하면서 홀도로게리미실에게 신임을 받 고 있었다.

“초비야, 조정은 원나라 오랑캐들이 장악하고 있다. 너도 알다시피 폐 하께서는 몽고여인에게 매를 맞는 지경이 되었다. 또한 그녀의 졸개들이 고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지 않느냐. 이번에 네가 고려를 위하여 큰 일을 해다오.”

최세연은 초비를 주루로 불러냈다.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최세연은 도성기에게 전달받은 약봉투를 꺼내 놓았다. 이것은 황천진액단명고란 약이다. 무색, 무미, 무취한 성질을 가지고 있단다. 이것을 왕비가 마시는 물과 술, 음료수에 미량 타서 마시게 하면 된다. 이 약을 복용하고 한 달이 지나면 서서히 약효가 나타나게 될 거야. 폐하와 고려 의 앞날을 위하여 반드시 몽고 출신 왕비와 그 측근들을 고려 조정에서 제거해야 한다. 나를 도와 줄 수 있겠지, 최세연의 말에 초비는 잠시 머 뭇거렸다.

“불쌍한 고려 백성을 구하고 폐하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어요.”

“길어야 두 달이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시비마마께서 너에게 큰 상을 내리실거야. 그리고 이 일은 절대 비밀에 부쳐야 한다. 자칫 외부로 이 사실이 새어나가면 여러 목숨이 죽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초비야, 왕비 가 입던 옷 한 벌을 몰래 빼오너라.”

“상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저의 두 오라비들이 몽고군과 싸우다 전사하셨습니다. 몽고는 저의 원수입니다.”

최세연은 초비와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면서 오랜만에 도타운 정을 쌓았다. 최세연은 옛정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초비 가 너무 고마웠다. 최세연은 이 일에 무비와 국내파들이 연관되어 있으 며, 장차 대도에 머물고 있는 세자 왕원의 입지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말해주었다. 세자 왕원은 원나라 대도에 머물면서 이름까지 이지리 부카(益知禮普花)라고 몽고식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세자가 대도에 머 무는 동안 의식주(衣食住)는 고려에서 충당하였다.

매년 그를 위하여 베 10만 필과 쌀 400곡(斛) 그리고 많은 금은보화가 대도로 실려 갔다. 이제 고려로 돌아와서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을 대비하 여 왕위 계승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하지만 그는 계속 대도에 머물면서 고 려 내정을 외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려 보다 원나라에 머물 며, 원나라 황실 내 이종사촌들과 친분을 쌓고 원나라 고위층과 인연을 쌓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원나라 황제조차도 왕원에게 고려로 돌아가라고 하였지만 그는 황제의 말도 듣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음식이냐? 맛이 기가 막히구나. 달착지근하면서 쌉싸래한것이 내 입맛에 착착 달라붙는다.”

초비가 왕비에게 식혜와 밀병(蜜餠)을 간식으로 올렸다.

“왕비마마, 이 음식은 식혜라 하는데 맛이 좋아 고려 백성들 누구나 즐겨 먹는답니다.”

“그러냐? 내가 자주 마시는 몽고 음식인 아이락 보다 훨씬 맛이 좋구나. 왜 내가 진작 이 음식을 몰랐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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