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고려왕 부처의 원나라 행차

왕비는 경성궁에 살면서 몽고 음식인 허르헉이나 호쇼르를 즐겼다. 양 고기와 채소를 이용해 만든 허르헉과 큰 만두를 빵처럼 구운 호쇼르는 왕비가 거의 주식(主食)처럼 즐겨 먹었다. 왕비는 식혜를 맛본 뒤에 식 사 때마다 올리라 하였다. 초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짐은 고려국에 계신 고모님이 보고 싶습니다. 속히 고모님과 고모부를 대도로 오라고 하세요.”

고려왕이 보위에 오른 지 22년째 되는 병신년 9월이었다. 2년 전 쿠빌 라이의 뒤를 이어 원제국 황제에 오른 테무르는 고려왕과 고모인 홀도로 게리미실의 입조(入朝)를 원하였다. 원나라의 입조 요구를 받은 왕은 차 일피일 미루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 만 왕비와 함께 원나라에 가기로 하였다. 왕은 쿠빌라이가 죽었을 때에 도 10개월 가까이 왕비와 함께 원나라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왕과 왕비 가 원나라에 가는 길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많은 인원과 물력이 필요하 였고 수만금의 비용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바칠 진상품과 공 녀도 차출하여 데리고 가야 했다. 고려 조정은 왕 내외의 원나라 행차 준 비에 부산하였다. 9월 초순 왕과 왕비의 행렬이 개경을 떠나 원나라로 출발하였다.

호종하는 신하와 호위무사가 243명, 가마꾼과 시중드는 사람 그리고 공녀를 포함하여 590명, 말이 990필 그리고 기타 특산물 및 금은보화가 수십 대의 수레에 실려 왕의 뒤를 따랐다. 20 여리에 걸쳐 길게 이어진 왕의 행차는 장관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길가로 나와 왕의 행 렬을 구경하였다. 국내파들은 왕과 왕비가 갑자기 원나라로 떠난다고 하 자 무척 아쉬워하였다. 늦은 밤 무비의 처소에 국내파들이 모여들었다.

“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몽고녀와 돌아오시면 우리의 계획을 다시 진행하도록 하세요. 도장군님은 천옥에게 진행하던 일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라고 전하세요. 그리고 각별히 입단속 시키세요.”

무비는 왕과 왕비의 원나라 행차에 크게 실망하면서도 왕이 국내에 없 을 때 친원파 들에 대한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였다.

“시비마마, 전하께서 원나라에 가시면 반년은 넘게 계시다 오실 것입 니다. 천옥이 지독한 저주 굿을 하여 몽고녀의 심신이 망가지도록 하겠 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개경으로 돌아오면 치유 불가한 중병에 걸려 있 을 것입니다.”

도성기가 자신 있게 말하였다. 최근에는 중랑장 벼슬을 하는 김근(金 瑾)이 국내파에 합세하여 힘을 보탰다. 왕과 왕비가 원나라로 떠나자 조 정은 무주공산이 된 느낌이었다. 친원파와 국내파는 사사건건 의견 대립 을 하면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였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염라대왕이시여, 기미년(己未年) 음력 7월 19일 오시(午時)생으로 고려국 개경 만월성내 경성궁에 살고 있던 고려의 원수 홀도로게리미실을 속히 데려가소서. 그녀로 인하여 우 리 고려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나이다.

몽고인들은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고려를 침입하여 매년 수백 명의 처녀를 공녀로 데려가고 고려 강 산에서 산출되는 곡식과 특산물들을 빼앗아 가고 있나이다. 몽고인들이 고려에 온 뒤부터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왕비는 국모로서 백성들을 보살피고 돌보아야 하는데 그 못된 몽고녀는 흡혈귀와 같아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염라대왕이시어, 고 려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어보시고 속히 몽고의 흡혈귀를 처단하여 주 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옥은 하루 세 번 섬뜩한 주문과 함께 칼춤 을 추며 왕비를 저주하였다. 천옥은 병으로 죽은 여인의 해골에 가발을 씌우고 짚으로 몸통을 만들어 초비가 건네준 왕비의 옷을 입혔다. 저주 의 인형 가슴에 홀도로게리미실의 이름과 사주를 적은 붉은 종이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굿이 끝나면 그 인형의 가슴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또한 왕비가 거처하던 경성궁 주변 여러 곳에 몽고군과 싸우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유골을 담은 상자를 묻었다.

원나라 수도 대도에 도착한 왕과 왕비는 테무르 황제를 알현하고 금 병, 금종, 누은호, 은탕병, 은잔, 은호병, 은대종, 은우(銀盂), 호랑이 가 죽과 표범 가죽, 수달가죽, 백저포, 대모초자 등 고려의 특산물을 바쳤 다.

그리고 얼마 뒤에 왕과 왕비는 죽은 쿠빌라이의 증손녀이며, 황제의 조카딸인 부다시린(寶塔實憐)을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세자 왕원은 황 제에게 백마를 폐백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왕과 왕비는 거의 매일 황제 와 태후 그리고 황실의 실력자들이 베푸는 각종 연회에 참석하느라 여념 이 없었다.

어느 때 왕비는 연회 중에 머리가 아프다며 자리를 뜨기도 하 였다. 시녀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자주 비슷한 일이 일어나자 황제는 어의를 불러 왕비의 상태를 살피게 하였다.

“폐하, 고려국 왕비마마께서 특별한 이상은 없으나 알 수 없는 어떤 사악한 기운이 심신을 지배하는 듯 합니다. 일단 약을 투여하였으니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가 홀도로게리미실의 처소를 찾아 그녀의 환우를 살폈다. 어의는 큰 죄를 지은 듯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 조아리며 황제에게 아뢰었다.

“고모님께서 고려에서 대도까지 먼 길 오시느라 병이 나셨나봅니다. 어의는 최선을 다하여 짐의 고모님 병을 치료하시오.”

황제는 고모의 환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황제가 돌아간 뒤에 고려왕은 몰래 어의를 불렀다.

“어의, 조금 전에 황제 폐하 앞에서 한 말이 마음에 걸려 내가 다시 물 어보려하오. 나에게 자세하게 말해 보시오. 왕비는 고려국의 국모입니 다. 기왕에 원나라에 왔으니 병을 고치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대는 의술 뿐만 아니라 강신술(降神術)도 능하다고 들었습니다.”

황제의 어의는 고려왕의 물음에 머뭇거리며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왕은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띠며 어의에게 은자를 건넸다.

“왕비마마 병은 약으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약으로 다스리지 못한다? 그럼, 초자연적인 그 무엇인가가 왕비의 심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오?”

“전하, 송구합니다. 소신이 진단하기에는 그럴 소지가 다분합니다.”

‘그 초자연적인 힘이 과연 무엇일까? 이는 분명 무비나 정화궁주(貞和 宮主) 또는 반주가 왕비가 잘못되도록 비나리를 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 다.

정화궁주는 왕비가 나와의 접촉을 못하게 한지가 이십년 가까이 되 었으니 그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을 것이야. 아아, 지아비가 일국의 왕의 신분임에도 조강지처를 건사하지 못한 결과로다. 어쩌면 왕비가 저리 병 들어 누운 것은 자업자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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