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지리부카의 복수

왕은 왕비가 병으로 누워 있어도 찾지 않았다. 그녀는 황궁에 머물고 있으면서 특별한 행사 이외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하루 세끼 식사조차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다. 왕 내외가 원나라 대도에 온 지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대도의 추위는 개경 보다 혹독하였다. 황량 한 사막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을 타고 수시로 눈발이 날렸다.

“어머니가 저리된 까닭이 누군가 지독한 저주를 하고 있어서 발병하였다는 거요? 그리고 어머니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다고요?”

고려의 왕세자 왕원도 은밀히 어의를 불렀다.

“소신의 경험으로 보아 누군가의 저주가 있는 듯 합니다.”

‘이것은 필시 개경에서 어머니를 저주하고 있는 악독한 세력들이 저지 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는 자들이 누구일까? 그들은 바로 정화궁주나 부왕의 애첩 무비 또는 반주 의 무리들이 분명하렷다. 내가 개경에 가면 그년들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잘못되면 내일이라도 당장 개경으로 달려가 내손으로 그 험악한 무리들을 처단하리라.’

왕원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물증도 없이 대도에 와있는 부왕에게 항의할 수도 없었다. 왕원도 부왕과 왕비의 사이가 좋 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왕원은 당장 개경으로 달려가 정화궁 주와 무비, 반주의 세력들을 처단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 어 애를 태워야 했다. 다행히 왕비가 회복하는 기미가 보이자 왕은 서둘 러 귀국길에 올랐다. 원제국 황제는 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했다. 날씨가 풀린 3월 중순 왕과 왕비가 대도를 출발하여 고려로 향했다. 낮에는 그 런대로 날씨가 걷기에 무리는 없었으나 해가 지면 황량한 대륙 벌판은 극한의 날씨로 변했다. 살을 에는 추위로 왕과 왕비를 호종(扈從)하는 병졸들과 노복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자, 오늘은 이곳에서 하룻밤 야영한다.”

조금만 더 가면 원과 고려의 경계인 압록수 였다. 왕을 호종하는 자들 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어두워지면 들짐승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임시 군막을 치고 불을 지폈다. 8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야영하는 것 도 큰일이었다. 왕비는 밤이면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다. 왕비의 몸은 지 난 해 가을 원나라로 향할 때 보다 살이 많이 빠져 홀쭉했다.

‘이러다 개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홀도로게리미실이 길 위에서 객사하 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왕은 홀로 술잔을 들면서 중얼거렸다. 무료해진 왕은 호종관 홀라대와 몇몇 중신들을 불러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왕은 홀라대에게 인후(印侯)라는 성과 외자 이름을 하사하였다. 왕은 병색이 완연한 왕비를 두고 술판을 벌였다. 왕은 왕비의 건강에 크게 관심을 주 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궁녀들이 왕과 중신들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술 시중을 들었다. 왕비의 겁령구 인후만 좌불안석이었다. 압록수를 넘었을 때 평안도 안찰사와 지방 관리들이 나와 왕 일행을 영접하였다. 일행은 연경을 출발한지 50여일 만에 개경 근처에 도착하였다. 왕이 곧 개경에 입성한다는 소식에 만조백관들과 궁인들이 성 밖까지 나와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왕비마마, 대도에 다녀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만조백관 맨 앞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비와 반주가 왕이 탄 어가 (御駕)를 맞았다. 무비의 빛나는 미모에 왕은 그동안 불편했던 심기가 한 순간에 환희로 변하였다. 무비와 반주가 날아갈 듯 절을 하고 일어섰다.

“무비야, 반주야. 과인이 원나라에 가있는 동안 너희들이 보고 싶어 눈 이 다 짓물렀구나. 잘 지냈느냐? 더욱 예뻐졌구나. 어서, 어가 위로 오르 거라.”

왕은 뒷자리에 누워있는 왕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비와 반주를 옆 자 리에 앉혔다. 왕비는 간신히 눈을 떠서 무비와 반주를 한번 쳐다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왕비가 개경으로 돌아와 사나흘 지나자 몸을 추스르 고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경대(鏡臺)를 바라보던 홀도로게리미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 경대를 집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흐느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그년들 때문이야. 그년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내 반드시 그년들을 죽여 버릴 것이야.”

왕비는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발악하였다. 이제 겨우 39세 밖 에 안 된 왕비의 모습은 60대 노파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친원파 세력들 과 겁령구 들을 불러 모으고 무비와 반주를 제거할 묘책을 물었다.

“왕비마마, 소신에게 좋은 방안이 있나이다.”

홀라대 인후는 왕비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경의 방책은 좋은데 무비와 반주에게 접근할 수 있겠소?”

“그게, 좀-.”

“좋아요. 내 시비(侍婢) 중에 초비라는 고려 출신 여인이 있어요. 그애 를 통해 무비와 반주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도록 하세요.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다. 자칫 여러 사람이 다칠 수 있어요.”

인후는 초비를 만나 왕비의 뜻임을 알리고 무비와 반주 처소에 있는 시녀 한명을 소개하라고 부탁하였다. 초비는 즉시 최세연을 만나 인후가 전한 말을 고했다. 최세연은 또 무비와 도성기, 송린에게 보고하였다.

“천격스러운 몽고년이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그 잘난 친정에 갔다가 다 죽게 돼서 돌아오더니 빨리도 죽고 싶은 게로군.”

“시비마마, 몽고녀의 계획을 우리는 모르는 척하고 역이용하는 겁니 다. 시비마마 처소의 나인 중에서 한 명을 초비를 통해 홀라대 놈에게 소 개하고 홀라대가 지시하는 내용을 우리가 알고 그에 대처하면 됩니다. 반주에게는 믿을 만한 나인이 없습니다. 일단 마마 처소에 있는 똑똑한 나인 한 명을 초비를 통해 홀라대에게 소개하시지요.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知彼知己)입니다.”

도성기가 말하였다.

“옳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부지피부지기(不知彼不知己)이니 싸우나 마나 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고 이쪽도 모르는 바보들입니다.”

송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신만만해 하였다.

“좋아요. 도장군께서 ‘연희’라는 아이를 초비에게 소개하고 홀라대에 게 접촉하도록 하세요. 그 아이는 상당히 영민하고 나의 의중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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