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몽고에 대한 고려백성의 저주

홀라대 인후는 초비를 통하여 연희를 만났다. 그는 연희를 이리 저리 뜯어보았다. 의심 많은 인후는 은밀한 이야기를 처음 보는 연희에게 말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름과 나이 등 신상에 대한 것을 물어보고 은자 (銀子)를 주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인후는 또 연희를 경성궁 으로 불렀다.

“왕비마마님을 뵙습니다.”

이번에는 인후뿐만 아니라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홀도로게리미실도 함께 연희를 만났다. 인후가 왕비에게 속삭이고 나서 연희에게 말하였다.

“무비를 궁궐에서 멀리 내치고자 하는 바는 왕비마마의 뜻이다. 네가 이 일만 잘 처리해주면 왕비마마께서 큰 상을 내릴 것이야. 우리 편이 되 어 일을 추진할 수 있겠느냐?”

“천비(賤婢)는 왕비마마님의 명을 받잡겠습니다.”

“길차게 생겼구나. 너를 믿으마. 이건 나의 성의이니 받아 두거라.” 왕비는 연희에게 금괴(金塊)가 든 상자를 건넸다. 왕비를 만난 연희는 인후로부터 별도로 밀명을 받고 약봉투를 건네받았다.

“그 약을 무비가 먹는 밥이나 음료수에 약간씩 넣어라. 한 달만 복용토 록하면 그년이 피를 토하고 죽거나 원인도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가 사지 가 뒤틀려 저승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 일은 너와 나만 알아야 한다. 그 리고 요즘 무비가 추종자들과 이상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

혹시 무슨 낌새를 눈치 채거든 즉시 나에게 보고해야 한다. 네가 왕비의 측근 이 되는 것이 이득이 되는지 아니면 왕의 애첩 편이 되는 게 좋은지는 잘 판단해 보거라. 왕비마마가 낳은 세자께서 장차 왕의 뒤를 이을 것은 자 명한 일이다. 너와 네 가문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네가 어느 쪽에 충성해 야 하는지 잘 알 것이다.”

연희는 무비의 처소로 달려와 인후가 건넨 약과 금덩이를 보이고 들은 바를 모두 고했다. 무비와 국내파 들은 박장대소하였다. 무비는 왕비와 인후가 자신들 보다 한수 아래라고 생각하였다.

왕은 무비와 왕비가 서 로를 음해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벌이고 있는 일들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다. 만약 왕이 무비의 대사를 눈치 챘다고 하더라도 그는 적극 말리지 않고 모르는 체 할 것이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저승의 염왕이시여, 기미년(己未 年) 음력 7월 19일 오시(午時) 생으로 고려국 개경 만월성내 경성궁에 살고 있는 고려의 원수 홀도로게리미실을 속히 데려가주소서. 그녀는 고 려 백성들의 피와 살을 먹고 사는 흡혈귀보다 더 악독한 여인입니다.

속 히 부르시어 똥오줌 통에 빠져 구더기가 온 몸을 파먹게 하시고 도산(刀 山)을 걷게 하여 온몸의 살점이 파헤쳐지고 베어지게 하소서. 몸의 살이 다 없어지면 찬바람으로 살과 피부가 붙어서 되살아나게 하여 이러한 고 통이 끝없이 반복되게 하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 다음에는 홀도로 게리미실을 무간지옥으로 보내어 악풍(惡風)으로 그녀의 몸을 건조시켜 피를 말려 버리고 살가죽을 벗겨서 끓는 쇳물에 넣어 몸을 태우고 쇠매 (鐵鷹)가 날아와서 눈알을 파먹게 하소서. 한 여인으로 인하여 고려 만 백성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부디, 배은망덕한 몽고인들이 고려에서 물러가도록 하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옥은 등활지옥(等活 地獄)과 무간지옥으로 왕비를 보내라고 저주의 주문을 외고 칼춤을 추 었다. 한바탕 춤판이 끝나면 왕비의 옷을 입히고 왕비의 이름과 사주를 붙여 놓은 해골 제웅을 향해 수십여 발의 화살을 쏘았다.

천옥의 저주가 있을 때 마다 왕비는 정신을 잃고 피를 토하거나 가슴을 쥐고 발악하다가 실 신하였다. 왕비의 병세는 귀국한 뒤로 호전되지 않고 갈수록 악화되었 다. 왕비에게는 어의들이 조제하여 올리는 탕약도 소용없었다.

“초비야, 내가 전에 즐겨 마시던 고려 음식이 있었잖니?”

간신히 눈을 뜬 왕비가 초비를 불렀다. 왕비가 원나라에서 귀국한 이 후 건강이 악화되자 왕비의 곁에는 늘 친원파 세력들이 머물고 있었다. 초비도 누워있는 왕비에게 함부로 음식을 올릴 수 없었다. 초비가 식혜 를 대령하였다. 왕비가 간신히 일어나 식혜를 마셨다.

“참으로 달콤하면서 쌉싸름하다. 우리 원나라에는 이 처럼 맛있는 음 식이 없단다. 친정에서 돌아온 뒤로 통 입맛이 없구나. 그리고 연희에게 서는 자주 연락이 오느냐?”

“마마, 연희가 무비년에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밥이나 국에 약을 타 서 올린다 하옵니다. 어제는 무비년이 먹은 것을 다 토하고 잠시 실신까 지 했다고 합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초비의 말에 왕비는 무척 흐뭇해하는 눈치였다.

“초비야, 작약(芍藥) 꽃 좀 구해오너라. 원나라에 있을 때 붉게 핀 작약 꽃을 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기분이 참 좋았단다.”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는 왕비는 초비가 올린 식혜가 입맛에 딱 맞는 지 밥은 먹지 않아도 하루 세 번 식혜는 거르지 않고 마셨다. 초비는 왕비가 식혜를 찾을 때마다 아양을 떨며 보기 좋은 떡과 함께 얼른 갖다 바 쳤다. 초비는 왕비뿐만 아니라 장순용이나 인후에게도 식혜를 올리고 남 몰래 미소 지었다.

왕비는 차도가 있는 듯 하더니 다시 상태가 악화되었 다. 그러나 왕은 왕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경성궁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 무비는 몸이 안 좋다며 자리에 누웠다. 무비는 왕비의 의심을 피하고 친원파 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꾀를 낸 것이었다. 무 비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은 왕은 즉시 무비의 처소로 들었다.

“무비야, 어디가 아픈 게야? 네가 아프면 과인도 심기가 편치 않단다. 얼른 일어나 과인과 도라산으로 사냥을 가야지. 너의 정읍사 노래와 춤 을 보고 싶구나.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왕은 무비의 손을 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무비를 위로하였다.

“폐하, 고맙습니다. 어지럽고 구토가 나서 잠시 누웠습니다. 며칠 지나면 좋아질 겁니다.”

왕은 어의를 무비 처소에서 숙위케 하면서 무비의 건강을 살피라고 하 였다. 무비가 몸져누웠다는 소식에 왕비를 비롯한 친원파들은 축하연을 열 정도였다. 왕비는 무비가 아프다는 소식에 반색하면서도 왕이 무비에 게 어의를 숙위케 하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친원파 세력들은 왕의 그 같은 행동에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왕비는 몸이 아 픈 상태에서도 분을 삭이려 술을 찾았다.

“마마, 작약 꽃을 가져 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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